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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she mysterious?일상/film 2018. 4. 23. 23:17
<판타스틱 우먼/드라마/세바스찬 렐리오/마리나(다니엘라 베가),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리예스)/104>
<레이디버드>를 볼까 고민하다 시간이 좀 더 편리했던 <판타스틱 우먼>을 선택, 관람. 이런 경험이 한 두 번은 아니지만 이 영화를 안 봤으면 후회할 뻔했다. (비록 대부분 4점 이상을 누르지만) 왓챠에도 5점 쾅쾅. 맨 처음 영화가 시작할 때에는 낭랑한 스페인어 대사가 흘러나와서 좋았고, 영화가 끝난 뒤에는 20분 가량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고 훨씬 이해가 잘 되어 좋았다.
트랜스젠더인 주인공 '마리나'의 삶을 그려낸 이 영화는 성소수자가 처한 어려움을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당하는 현실에 대해 담담하게 고발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큐레이터의 설명과 여러 기사에 따르면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성별 정정의 조건으로 성전환 수술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현실에는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은 상당수의 트랜스젠더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들은 법적으로는 신체적인 성을 유지하면서도 정체성면에서는 다른 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그야말로 법 테두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인 것이다.
'마리나' 역시 그러한 케이스인데, 영화의 제목(a fantastic woman)과 달리 사람들이 그녀를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정체를 알 수가 없다(mysterious)'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는 트랜스젠더라는 표현이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마리나의 중성적인 캐릭터―주인공 연기를 한 다니엘라 베가는 감독 세바스친 렐리오가 처음 스크립트 컨셉팅을 위해 조언을 구하던 실제 트랜스젠더 뮤지컬 배우로, 마침내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발탁되기에 이른다―의 정체를 분간하는데 곤란함을 겪는 것도 사실이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의 그녀는 다소간 위화감을 주기도 하지만, 주눅들지 않는 용기와 (특히!)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그녀는 꿋꿋하다. 전처의 가족에게 강제로 빼앗겼던 개 '디아블라(diabla)'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녀는 마침내 개를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Diabla. 스페인어로 따지면, 액면 그대로는 악마의 여성형을 나타내지만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각광(footlights; 脚光)'이다. 그녀는 영화의 피날레에서 각광받는 오페라 배우로 거듭난다. 이 때 그녀가 부른 곡이 <사랑스런 나의 그늘이여(Ombra mai fu)>다. 이때 '그늘' 역시 양가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늘은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곳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위에 지친 이에게는 편안한 휴식처이기도 하다. '마리나'는 자신의 내면에 드리워진 짙은 그늘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 그늘로서 상처받은 이들을 보다듬는 용기있는 인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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