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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자들의 기록일상/film 2019. 1. 27. 21:14
<우행록/드라마/이시카와 케이/다나카(츠마부키 사토시), 미츠코(미츠시마 히카리)/120>
"일본은 격차사회가 아니라 계급사회야!!"
아마도 원작이 있는 있는 작품이지 아닐까 싶다. (찾아보지는 않았다;;) <오렌지 데이즈>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내게 긍정적인 인상을 주었던 츠마부키 사토시의 작품이 오랜만에 나왔길래 모처럼 일본영화를 봤다. 요새 보고 싶은 일본영화가 몇 편―<어느 가족>과 <인생 후르츠>―있었는데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았다가 금요일 퇴근길 이 영화를 봤다.
볼 때는 나름 재미있게 보기는 봤는데, 곱씹어보면 곱씹어볼 수록 이야기의 전개가 좀 엉성했던 것 같다. 문제의 실마리가 갑자기 등장한다든가 억지로 퍼즐조각을 끼워맞추는 느낌이 든다든가 하는 식으로.. 영화의 결말도 대충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그래도 캐릭터들의 색깔이 뚜렷하고, 무엇보다 영화가 건드리는 문제의 본질이 매우 명확하다. 특히 스토리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계급'이라는 주제를 감독이 조명하는 방식에 공감한다.
오늘날 일본사회―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회 역시―는 극복할 수 있는 '격차'로 개인이 규정되는 곳이 아니라,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엄격한 '계급'이 작동하는 곳이다. 계급의 매커니즘 안에서 개인이 살아남는 것은 두 가지 : 태어날 때 주어진 계급에 철저히 복종하든가, 상위 계급으로 이동하기 위해 자신의 도덕성을 내려놓고 정신세계를 전복시키는 것.
영화에는 후자의 방식을 택한 젊은이들이 몇몇 등장한다. 어릴 적부터 경제적으로 궁핍한 환경에서 자라난 젊은이, 온갖 학대에 노출되어 자라난 젊은이,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은 젊은이까지. 미츠코가 품었던 생명이 끝내 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이들의 삶은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살아간다. 자신에게 할당된 계급을 혐오하는 이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오로지 모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이들은 멀쩡하게 말을 할 줄 알고 감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분명 정신적으로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초한 것은 아니다.
'위'라는 개념이 있다면 '아래'라는 개념이 따라오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지위나 부(富)에 상대적인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그것이 대물림될 때의 일이다. 그래서 격차가 자연적으로 증감하지 않고 오히려 간극이 손쓸 수 없을 만큼 넓어질 때의 일이다. 다나카와 미츠코 남매는 잔인한 부모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 나름대로 '선(善)'을 찾아 발버둥치지만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잉태한 것은 더한 '악(惡)'이었다. 사회적·경제적·정서적 양극화가 어떻게 괴물을 탄생시키는지 영화는 충실히 묘사한다.
<가버나움/드라마/나딘 라바키/자인(자인 알 라피아),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126>
"나를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실제 시리아 난민인 꼬마가 캐스팅되어 주연을 연기한 영화다. 그밖에 라힐이나 사하르 같은 배우들도 실제 배우가 아니라 영화 속 인물과 동일한 처지에 처해 있는 인물들이다. 어쩐지 영화를 보는 내내 아역들이 너무 연기(?)를 너무 잘해서 어떻게 캐스팅을 한 건가 싶었는데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인데, 영화에 묘사되는 열악한 주택과 거리 또한 실제와 똑같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레바논은 지역에 따라 치안이 안 좋은 곳도 많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촬영을 한 것 자체가 용감한 시도라 생각한다..
자신이 태어난 날짜도 모르고, 때문에 자신의 나이도 정확히 모르는 자인이라는 소년은 위의 다나카-미츠코 남매와는 불행에 처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사회적 불합리가 짓누르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어딘가로' 탈출을 시도하는 모습은 미츠코와 판박이다. (가령 미츠코는 대학교를 탈출구로 삼는다) 일본은 문명이 발달한 사회인 반면 레바논은 문명이 파괴되고 있는 사회라고 가정하면 자인이 처한 상황이 더 위태로워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이들 개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굳이 저울질할 필요가 없을 만큼 동질적인 것이다.
오히려 미츠코는 사람의 생명을 짓밟는 방향으로 자신을 합리화하지만, 자인은 법적 조치를 통해 자신의 삶을 나아지게 하려는 명민한 소년이다. 그렇기 때문에 레비스트로스의 말처럼 사회의 외양(外樣)만 보고 문명사회와 비문명사회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다. 자인은 참 호감가는 꼬마지만 미츠코라는 인물은 소름끼치는 젊은이다. 그러나 <가버나움>에도 함정은 있다.
자력으로는 경제 상황과 치안을 개선시킬 수 없는 레바논과 그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 <가버나움>은 예수가 사도를 행했던 갈릴리의 한 마을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시리아 난민을 구호하기 위한 자선단체의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 영화의 제작을 후원한 것도, 이 영화의 해피엔딩의 이끌어내는 것도 '가버나움'이라는 존재감을 상기시킬 뿐이다. 시리아 난민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은 보다 근본적인 영역에서부터 모색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각자의 이해관계를 갖고 시리아 문제에 개입하는 강대국들이, 다른 한 편으로는 시리아의 현 상황을 우려스럽게 바라보며 피상적으로 도움을 주는 모습은 대단히 위선적이다.
그렇다고 내가 딱히 뾰족한 수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사람들은 근본적인 문제들에 의외로 관심이 없는가보다 하며 때로 회의주의에 젖는 어른일 뿐.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한 사람은 오로지 행복만을 취하면서 또 다른 누군가는 오로지 불행만을 감내해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냥 개개인이 희노애락을 느끼며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이번 리뷰도 말이 산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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