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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s Obras Maravillosas일상/film 2019. 1. 7. 19:40
<로마/드라마/알폰소 쿠아론/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135>
"전 아기가 태어나는 걸 원치 않았어요"
넷플릭스에서 제작된 영화라 상영관을 찾기가 좀 어려운 게 아니었는데, 봉준호 감독의 <옥자> 때보다도 상영관을 찾기가 엄청 힘들었다.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을 통해 상영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영화라고는 하지만, 정말 좋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린 영화관을 확보하지 못해 대중의 관심을 얻지 못하는 것이 참 아쉽다. 어떤 플랫폼의 다양화냐 플랫폼의 대기업화냐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사실 이 영화는 단 한 장면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버릴 장면이 하나도 없었던 작품이다. 흑백 필름이지만 화면 구성의 다채로움이 생생하게 전달될 만큼 알폰소 쿠아론이 배경과 소품, 인물들의 표정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것이 보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영화가 시작되는 가장 첫 장면이다. 클레오가 물청소를 하고 배수구에 거품 낀 물이 일렁이는데, 투명한 물 너머로 가옥의 상층부―클레오가 지나는 다락―와 고정된 점처럼 비행기가 비춰진다. 이후로 비행기의 정적인 움직임은 영화 곳곳에 배치된다.
영화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로베르토 볼라뇨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작품으로 보자면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아모레스 페로스>의 좀 더 정제된 버전 같기도 하다. 감독 자신의 유년시절을 투영하고 있는 영화 <로마>는 남미에 침투하여 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크리오요의 후손들과 그들의 수발을 드는 신세로 전락한 원주민들의 이분법적인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 아니라, 시민사회의 성장과 이를 허물어버리려는 중앙정부의 무자비한 폭압은 근현대 중남미 국가들이 미숙한 민주주의에 이르는 노정을 보여준다.
무던한 살림꾼인 클레오의 연기는 단연 돋보이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배우 자신이 알폰소 쿠아론에게 캐스팅되기 전까지 한 번도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을 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클레오의 까만 눈동자는 행복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픔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녀가 잉태에서 사산에 이르는 과정은 60~70년대 비교적 안정된 경제성장을 구가했다고 알려진 시기 멕시코 사회 전반을 짓누르고 있던 공안정국과의 불편한 공존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외줄타기를 한다. 사실 클레오가 건배한 잔을 엎지르는 장면이나, 신생아실을 들여다볼 때 지진이 나는 장면이나, 친부인 페르민에게 철저히 외면 당하는 장면으로 미루어볼 때, 관객으로서는 그녀의 결말이 순탄치 않을 것이 명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침착하게 열망하는 앞날이 그녀의 바람대로 이뤄지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폭력과 이기심, 그리고 위선으로 점철된 존재이다. 극단적인 장면은 1971년 시위에서 페르민이 임신한 클레오에게 권총을 겨누는 장면이다. 또한 소피아의 남편 안토니오는 아내와 자녀들을 뒤돌아보지 않고 새로운 사랑을 위해 가정을 버릴 뿐 아니라, 클레오가 수술실로 옮겨지는 급박한 장면에서 클레오를 안심시키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녀를 돌봐줄 수 없다며 사라져 버린다. 민주화와 부패척결을 열망했던 시민들의 성장과 구태의연하게 비리와 폭력을 일삼은 남미 정권의 대비가 자연스럽게 겹치는 대목이다.
<미스터 스마일/드라마/데이비드 로워리/포레스트 터커(로버트 레드포드), 존 헌트(케이시 애플렉)/93>
새해 첫날 함께 한 영화, 미스터 스마일. 오하이오 일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와는 다소 등장인물이나 상황설정이 다르기는 하지만 텍사스를 무대로 했던 <로스트 인 더스트>라는 작품이 떠올랐다. <로스트 인 더스트>에는 패기에다 객기까지 넘치는 젊은이 둘이 은행을 휩쓸고 돌아다니다 씁쓸한 최후를 맞이하는 이야기라면, <미스터 스마일>은 범죄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점잖은 느낌(?)이 날 뿐 아니라 영화의 결말도 나쁘지 않다.
<미스터 스마일>은 로버트 레드포드의 은퇴작으로 알려지면서, 최근 그가 출연했던 걸출한 작품들이 종종 재상영되고 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흐르는 강물처럼>을 통해 이 배우를 단 한 번 접해 봤을 뿐이고 그마저도 브래드 피트가 한창 젊었을 때 풋풋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보니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작품을 눈여겨 보지는 않았었다. 꼭 이런저런 필모그래피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은행털이범으로서 그의 품위 있는(;;) 모습과 유머러스한 대사만으로도 로버트 레드포드가 펼치는 연기에서 노련함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노년의 배우와 함께 황혼의 반려자 역할을 하는 쥬얼 역의 씨시 스페이식의 미소도 <미세스 스마일>이라는 별칭을 붙여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영화에서 형사로 등장하는 케이시 애플렉의 활약상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형사만큼 끈덕지게 수사를 펼치는 모습이 연출되었다면 영화의 극적 분위기가 더해졌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실화를 각색한 본 영화의 특성상 미스터 스마일(포레스트 터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존 헌트라는 인물은 여러 제약―가령 무력하게 FBI에게 수사 관할을 넘기는 것처럼―을 받는다. 적절한 대비가 없는 만큼 약간은 밋밋한 느낌이 있는 영화지만 적절한 긍정 에너지는 얻어갈 수 있는 영화였다.
<리지/범죄, 스릴러/크레이그 맥닐/브리짓 설리번(크리스틴 스튜어트), 리지 보든(클로에 세비니)/105>
밥까지 걸러가면서 신촌에서 본 영화. 또한 그만한 값어치를 했던 영화. 신경증 환자 역을 맡은 클로에 세비니의 냉혈한 같은 연기에 한 번 놀라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열연을 보며 괜히 주목받는 하이틴 스타인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중반까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무뚝뚝하고 절제된 연기도 좋았지만, 긴장이 극도로 폭발하는 클라이맥스에서 오감을 초월하는 감각 또는 감정에 덜덜 떠는 장면을 보며 나마저 얼떨떨해졌다.
이 영화 역시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19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배우들의 복장이나 집안의 가구와 소품들 또한 당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주인공인 리지 보든의 의상에 많은 공을 기울인 듯 하다) 여러 가지의 범죄/스릴러물을 봐왔지만, 유독 <나를 찾아줘>라는 작품이 떠올랐는데 아마도 평범한 가면 뒤에 숨겨진 주인공의 악행이 유혈낭자하게 표현되기 때문인 것 같다. 순간순간을 흘려보내는 평범한 사고방식으로는 떠올리기 힘든 엽기적 행각, 그럼에도 그러한 기행(奇行)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롤리타>의 발간 뒤 작가의 말을 통해 남겼듯, '통념'을 벗어났다고 해서 작품성 자체를 마구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데 공감한다. 보스턴이라는 보수적인 프로테스탄트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청교도적 삶을 강요받았던 리지. 또한 양어미니 아래에서 외롭게 성장한 그녀의 일대기를 들여다 보면 그녀가 괴물로 화(化)한 것도 그리 이상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 주인공의 악행에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단지 나와 전혀 무관한 일만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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