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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말하는 광기(狂氣)일상/film 2019. 3. 23. 15:10
<송곳니/드라마/요르고스 란티모스/안겔리키 파풀리아(큰 딸), 마리 초니(작은 딸), 크리스토스 파살리스(아들)/97>
영화관에 잠깐 상영되었다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영화라 하더라도 가능하면 다 찾아서 보는 편이다. 그만큼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선호하는 장르나 배우, 감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단연 요즘 나의 관심을 끄는 작품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친숙하게 알려진 감독이 아니기도 하고, 다작(多作)을 한 감독도 아니지만 계산을 해보니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작품을 네 편 정도 보았다.
사랑과 사냥을 결합한 독특한 컨셉을 차용한 <더 랍스터>까지만 해도 재미있게는 봤지만 이 감독의 작품이 마음에 든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 최근에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이 <킬링 디어>. 이전에도 감상을 남긴 적 있었던 이 작품은 함무라비 법전의 한 구절―눈에는 눈 이에는 이―을 연상시키는 한편, 피해자를 가해자화하고 가해자를 피해자화함으로써 선과 악의 대치를 한 번 더 꼬아놓는다.
<송곳니>는 최근에 재개봉하면서 관람한 영화로, 이 영화에서는 모든 낱말이 붕괴(崩壞)된 상태로 등장한다. 그리고 높은 담장 안 넓은 대저택에 사는 이 일가는 오로지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 새로운 명명(命名) 작업을 수행한다. 이 영화는 참 많은 것들을 연상시킨다 :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플라톤의 <동굴 우화>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언행은 사실 이들에게만은 의미를 띤 작업들이다. 이들은 그들만의 세상을 세워올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단연 가장 많이 연상되었던 것은 플라톤의 동굴 우화이다.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삼남매에 앞서 송곳니가 빠지기 이전에 집을 나가버린 맏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맏아들이 바로 플라톤의 동굴 우화에서 동굴을 빠져나와 실재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부모의 꼭두각시가 되어 자율성을 상실한 삼남매는 불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세상의 전부를 알고 있다고 안도하는 노예 상태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부모의 바람대로 문제 없이 굴러갈 것 같던 이들의 세계에 균열의 조짐은 이미 영화의 시작부터 등장한다. 이들 가족이 사는 집에는 꾸준히 외래인이 출입하는다는 사실은, 부모(특히 아버지)가 지탱하고자 하는 그들의 거짓 세계관이 실재하는 세계로부터 차용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암시한다. 실재 세계를 드나드는 제복 차림의 여성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삼남매에게 실재 세계의 잔상(殘像)을 남기고, 그 중에서도 맏딸은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송곳니가 빠지는 시기가 되어야 집을 나갈 수 있다는 엄준한 규칙은, 급기야 개인의 바람이 되고 맏딸은 자신의 송곳니를 망치로 때려 부서버린다. 그녀는 불빛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잇는 질문은 그녀가 탈출하고자 하는 바깥 세계는 진정 정상적(正常的)인 세계인가. 사실 우리 사는 세계라는 것도 임의로 만들어 놓은 규칙, 법률, 상식에 맞춰 억지로 끼워맞춰진 허술한 퍼즐조각 같은 것은 아닐까.
<더 페이버릿/드라마/요르고스 란티모스/앤 여왕(올리비아 콜맨), 애비게일(엠마 스톤), 사라 제닝스(레이첼 와이즈)/119>
이 역시 굉장히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영화다. 앤 여왕이라는 우둔하고 완고한, 그렇지만 카리스마 있는 인물을 보며 마음 한 구석이 풀어졌다고 해야 할까, '브로드처치'라는 영국드라마로 처음 알게 된 올리비아 콜맨이라는 여배우가 이렇게 멋진 연기, 멋진 스토리를 풀어냈다는 것이 대단하다 싶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두 여인―애비게일(엠마 스톤)과 사라 제닝스(레이첼 와이즈)―의 질투어린 호가호위(虎假虎威)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의사결정의 중심에는 앤 여왕(올리비아 콜맨)이 자리한다는 점에서 앤 여왕의 유아적인 강박증과 변덕스러움, 우둔함 뒤에 감춰진 예리함이야 말로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큰 맥(脈)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앤 치세하의 17세기를 배경으로 하는데, 로코코풍의 궁정은 풍경이 대단히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궁중여인들 역시 최대한 과장된 복장을 입고 남성들은 흰 가발을 즐겨 쓰는데, 앤 여왕의 화장은 때로 너무 과하다 못해 못난 삐에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광각렌즈를 이용한 실험적인 촬영기법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상태가 부풀려지고 궁중 내부의 화려한 인테리어도 한껏 가득 담긴다.
<더 페이버릿>이라는 영화는 일부 앤 여왕 치세의 영국상황(프랑스와의 전쟁 등)을 차용하기는 했지만, 많은 부분이 각색되었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앤 여왕이 동성애를 즐겼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고증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사실인 것은 앤 여왕이 뛰어난 통치능력이나 정치적 수완을 보여준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인데, 게다가 여인들의 치맛바람 사이에서도 영국이 세계를 호령할 만큼 국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일찍부터 발달한 의회정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영화에는 지주(地主)에 기반을 둔 토리당(오늘날의 보수당)과 상공계급에 기반을 둔 휘그당(오늘날의 자유당)이 서로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키려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여왕은 때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특정 계급과 특정 가치관을 대변하는 정당의 존재는 극단적인 정치적 선택으로 빠지지 않도록 방어막이 되어준다. 이처럼 세 여인의 드라마 속에는 개인의 시기심이 담겨 있고, 유약함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한 시대를 지배하는 정치철학이 담겨 있기도 하다. 디테일한 미장센과 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는 눈을 만족시키고, 거대한 주제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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