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고통과 우리의 고통일상/film 2019. 4. 27. 01:49
작년 초겨울부터 개봉을 기다렸던 영화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영화를 보게 된 것도 카페에서 멍하니 책을 읽다가 바로 옆 영화관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것을 알고 상영시작 5분 전에 즉흥적으로 발권하여 본 것이다. 거의 일 년 가까이,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죽죽 읽어나가고 생각없이 영화를 보는 것이 주말의 유일한 낙이 되었다. 잡음으로 시끌벅적한 일상에서 유일하게 음소거를 하는 시간. 이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써는 무엇이 생산적일지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영화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다루다가 결말에 이르러 대단히 사회적인 이슈를 다룬다. 이혼을 앞둔 제냐-보리스 부부는 아이가 느끼는 혼란과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행복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인물들이다. 이 둘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일부분을 희생할 자세가 조금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내가 가장 싫어하는 태도 중의 하나로 상대방이 말을 하는데 분주하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서로 각자가 이상적인 반려자라고 그려왔던 새로운 애인을 두고 있는데, 결혼생활에 파국을 맞은 부부가 밟는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제냐와 보리스 모두 생각이 짧아 보이고 위태로워 보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결국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는 아들 알로샤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 급속도로 냉각되고 악화된다.
제냐와 보리스는 조금도 비극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배우자간에 서로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이 둘의 결혼생활은 파국으로 치닫았고, 그들은 위기를 정면돌파하는 대신 각각의 애인에게 의존하는 손쉬운 전략을 선택했다. 결국 알로샤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을 때조차 그들은 끝끝내 현실을 부정한다.
꽤 신선하다. 러시아어로 만들어진 영화가 이렇게 사회비판적인 소재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도 사상검열이 어마어마한 러시아가 아닌가.
사건이 있은지로부터 일정 시점이 흘러, 각 등장인물들이 원래의 삶으로 복귀한 장면이 조명된다. 제냐와 보리스는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서로 유리(遊離)된 채 각자의 삶을 영위한다. 그런 그들의 삶은 능동적이기보다 기계적인 것 같다는 인상마저 준다. 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덧씌워졌고 육체적인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같다. 그리고 이러한 영상 위를 덮는 사운드는 뜻밖에도 우크라이나-러시아간 전쟁에 관한 뉴스다. 강제로 병합된 크림반도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은 오늘내일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전쟁상황 앞에서 울부짖으며 인터뷰한다.
겨울공기를 맞으며 무심한 표정으로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제냐. 이 여자는 과연 무엇 때문에 이토록 감정이 메말라 버렸을까. 애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보채자 귀찮다는 듯 간이 울타리 안에 아이를 넣어버리는 보리스. 이 남자는 과연 무엇 때문에 이토록 우둔해진 것일까. 이 영화는 개인이 사적인 영역에서 겪는 비극을 매우 깊이 있게 조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의 짤막한 상영기간을 빌려 전쟁에 대한 뉴스를 무미건조한 톤으로 흘려보낸다. 다시 말해, 사적으로 겪는 고통에 비해 사회적인 고통은 매우 가볍게 다뤄지고 있다.
결국 떠오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사적인 고통과 공적 또는 사회적인 고통이 이토록 괴리(乖離)될 수 있는가. 개인의 비극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분담에 대해 말하면서, 공적인 비극에 대해서는 냉정할 정도로 무관심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꽃피울 때 정치라는 공적 영역은 사적 영역과 일치했다. 이는 폴리스(도시국가)라는 공간이 하나의 운명공동체라 해도 좋을 만큼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겹치는, 고도로 집적화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의 규모가 폴리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심지어 국가간 연합체를 이야기하는 오늘날, 모든 시민이 공적인 영역에 발을 깊이 담그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자국의 근대사에 무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사람들이 국경에서 벌어지는 전쟁-체첸/우크라이나와의 분쟁, 또는 정부비판적인 언론인을 탄압하는 러시아 정부의 폭정이든-에 대해 상세히 모르리라는 것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양상이 다를 뿐 이러한 흐름은 우리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여하간 상황이 이러하다면 삶의 무게에서 가장 큰 질량을 차지하는 것은 사적인 영역에서 오는 것들이다. 그러나 과연 사적인 영역에 함몰된 현대인이 공적인 영역을 전혀 (또는 거의) 영위하지 않은 채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그러한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매끄러웠던 이야기의 흐름을 단번에 반전시킨다.
'일상 > fil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멋지고 한심한 사람들의 해피엔드 (0) 2019.05.03 이 못난 쏨뱅이일지라도 (0) 2019.04.30 두 얼굴의 히어로 (0) 2019.04.14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말하는 광기(狂氣) (0) 2019.03.23 담아둔 말, 삼킨 말, 그리고 간직한 말 (0) 2019.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