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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고 한심한 사람들의 해피엔드일상/film 2019. 5. 3. 20:35
영화를 본 뒤 맨 처음 드는 생각은 차갑다는 것이다. 차가워도 너무 차갑다. 프랑스의 따스한 풍광을 담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무심하리만치 차가울 수 있는 것일까. 영화에는 대가족의 다양한 군상(群像)―로랑 일가(一家)―이 묘사되어 있지만, 어느 인간 하나 인간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해피 엔드>라는 영화의 제목은 철저하게 조롱이다. 첫째 전혀 ‘해피’하지가 않다. 둘째 영화에 ‘엔드’가 빠져있다. 영화 속 인물들의 부조리한 삶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임을 암시한다.
나중에 뒤돌아 생각해보면 오싹하다. 공사현장이 붕괴되는 장면에서는 라디오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완벽히 제3자의 입장에서 사고현장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앵글.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엄마의 일상을 휴대폰으로 담는다. 화장실에서의 행동거지와 주방에서 요리하는 모습. 휴대폰의 촬영화면 속에 쓸쓸히 갇혀 있는 엄마의 모습. 어떤 남녀가 인터넷으로 외도를 한다. 컴퓨터 화면 속 음란하고 퇴폐적인 텍스트들. 모든 것이 익명성이라는 망토를 두르고 악랄하게, 그렇지만 아주 평범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참으로 멋진 사람들이 아닌가. 그림자 하나 지지 않은 얼굴, 단아한 옷차림, 근사한 식사, 두셋의 하인들, 사회에서 관리직에 있다는 계급적 우위까지. 어린 소녀의 금발과 오똑한 코마저도 멋스러워 보인다. 마그레브 지방에서 올라온 하인들을 보며 ‘노예 계급’이라고 칭하는 등장인물(피에르 로랑)이 있는가 하면, 어머니의 결혼식 자리에 일면식도 없는 흑인 일동을 데리고 급작스럽게 나타난 등장인물(이 역시 피에르 로랑). 어머니(앤 로랑)은 그런 아들의 말썽에도 불구하고 초대되지 않은 손님들에게 고급요리를 주문해준다. 이 얼마나 관대한 일인가. 그러면서 자신이 일군 가업을 아들이 이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심지어 헌신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아들의 오만불손한 행동이 멈추지 않자 가차없이 손가락 마디를 완전히 꺾어버리는 엽기적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어딘가 어색하다. 어색해도 너무 어색하다. 정작 자기관리는 전혀 안 되는 사람들이다. 제 손으로 아내의 목숨을 해치운 철면피 할아버지(조르주 로랑), 길거리에서 만난 흑인 일동에게 무언가 훈계를 하는 오지랖 넓은 할아버지(이 역시 조르주 로랑), 이혼 후 재혼을 하고 또 다시 외도에 나선 아버지(토마스 로랑), 딸에게 온갖 애정을 쏟아부으면서도 정작 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비정한 아버지(이 역시 토마스 로랑), 사고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관리자로서의 위법성을 조각(阻却)하려는 어머니(앤 로랑), 끝으로 친구들에게 장난삼아 향정신성약물을 먹이는 말썽쟁이 손녀(이브 로랑)까지. 이 모든 비정상(非正常)이 지극히 차갑게 그려져 있다. 위선(僞善), 계급의 안락함이 낳은 괴물, 현실에 대한 비정상적인 인식이 죽죽 냉정하고 도도하게 그려진다.
감독은 로랑 일가의 독선과 오만을 묘사하기 위해 극적인 기법이나 장치를 최소화한다. 오히려 이러한 행태들이 이상하다고 느낄 만큼 아무렇지 않게 담기기 때문에, 위험한 이들의 일상이 평범하게 수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된다. 나는 감독의 이러한 서술방식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우리는 흔히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드라마틱한 변곡점들에 의해 발생했다고 믿거나 바란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영화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실 우리의 삶은 비극까지는 아닐지라도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수많은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각각의 순간에는 언제 어떤 사건(event)로 이어질지 모르는 무수히 많은 하인리히의 법칙이 잠재되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인 이 모든 우연적인 가변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는 흔들림 없이 불변하는 것들이 몇몇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령 영화 속 계급구조처럼 말이다. 우리가 이른바 선진사회라 일컫는 국가들에 계급이 공고하게 잔존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계급을 가르는 구분선이 보다 세련되게 다듬어졌을 뿐 계급에 따른 구분과 그에 따른 인식변화는 신석기 시대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본인의 나약함과 무능함, 그리고 위선을 망각한 채 자신의 계급범주 안에 안주하려는 영화속 로랑 일가는 진저리나는 인물들이다. 자기 자신들에 대한 비판능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사람들. 그러한 계급의 속성과 인간의 관성을 매우 냉철하게 그려낸 이 영화는, 수미상관식의 앵글을 활용하여 이러한 멍청이들에게 기대치 않은 해피엔딩을 선사한다. 영화의 마지막 이자벨 위페르(앤 로랑)는 바다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가다가 잠시 엉거주춤한다. 그리고 뒤돌아 자신의 조카(이브 로랑)을 바라본다. 모든 세계를 방관한 채 모든 대상을 객체화하고 있는 비정한 조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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