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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못난 쏨뱅이일지라도일상/film 2019. 4. 30. 23:35
‘다름’이라는 주제는 내게 가장 어려운 주제 중 하나이다.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름’을 규정하는 시도는 실로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가령 ‘평등’이라는 개념은 절대적 평등과 상대적 평등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늘 첨예하게 대두되는 문제는 절대적 평등과 상대적 평등, 이 둘을 나누는 문제가 아니다. 과연 어느 선(線)까지를 상대적인 차이로 수용할 것인지를 정하는 문제야말로 지난(至難)한 문제이다.
꼭 이러한 철학적 논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쌀쌀한 날씨를 누군가는 후텁지근하다고 느낄 수 있고, 누군가는 불쾌해 하는 일을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는 것처럼 아이러니한 상황은 일상에서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이러한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인간은 임의의 구분선을 만들어 놓지만, 인간사회가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개인과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보니 그러한 구분선이 더 이상 구분선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는 경우가 발생한다.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 대신 보남파초노주빨이라고 묘사하면 왜 어색할까) <하트스톤>이라는 영화는 바로 그러한 지점들 중 하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장난기 가득한 소년들 무리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신나게 잡아올린다. 싱싱한 명태 사이에서 눈에 띈 쏨뱅이 한 마리. 질풍노도의 꼬마들은 쏨뱅이가 못 생겼다며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쏨뱅이를 밟아 짓이겨 버린다. 이때 소년들의 폭력을 제지하는 것은 주인공 크리스티안. 그는 영화에서 짓밟힌 쏨뱅이로 비유될 수 있는 인물로 이후의 전개에서 성소수자로 그려진다.
영화에서 읽어낼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메타포는 쏨뱅이의 반대지점에 놓인 명태들, 즉 성다수자들이다. 크리스티안의 절친한 친구 토르는 명태 한 아름을 안고 의기양양하게 집에 도착하지만, 그가 어머니에게 기대했던 칭찬과 달리 그에게 되돌아 온 것은 냉소적인 반응 뿐. 한 술 더 떠 어머니는 그에게 도둑질하고 다니지 말라며 가져온 생선을 집밖에 방치해 둔다. 결국 쓰레기 상태가 될 때까지 싱싱했던 명태 무더기는 요릿감으로 쓰이지도 못한 채 통째로 썩게 된다. 감독은 쓰레기로 전락한 명태라는 비유를 통해, 쏨뱅이에게는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한편 명태에게는 비판의 날을 세우는 듯하다.
사실 나는 영화관에 입장하기 전까지 내가 예매한 티켓이 <하트스톤>이라는 것을 몰랐다. 금요일 저녁에 관람 가능한 영화를 예매한다는 것이,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해피 엔드>를 예매해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예매권을 꺼내보일 때 예매한 영화가 <하트스톤>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요새 내 정신이 이사간 모양이다. 뭘해도 심드렁한 요즈음 같아서는 차분한 톤의 북유럽 영화를 볼 생각을 하니 아차차 싶었지만, 예매한 표를 도로 물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 우선은 착석했다. (그러고는 결국 바로 다음날 직성이 안 풀려서 <해피 엔드>를 보기는 봤는데, 프랑스 영화라고 해서 기대했던 발랄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작품은 아니었다=_=)
여하간 '틀림'과 '다름'은 엄연히 다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다른 것을 두고 그것이 틀리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틀리다고 말하면 정말 그것은 틀린 것이 되느냐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을 가진 소수가 옳고 그름을 규정하는 역사적 사례—예컨대 나치의 유태인 학살—도 적지 않았음을 역사는 말한다. 물론 권력의 장악보다는 수적인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약자 또는 소수를 틀렸다고 매도하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올바른 구분선을 치열하게 찾아나가는 것은 정치하는 동물로서 인간이 짊어져야 할 숙명이 아니겠는가.
갈매기알을 구하기 위해 바다절벽 아래로 내려간 토르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 총구를 겨눈 크리스티안이 살아돌아온 뒤 얻은 것은 무엇인가. 약자인 것, 소수인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무엇이 '다름'을 가르는가가 문제일 뿐. 약자의 목소리는 작은 것일 뿐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다. 영상면에서는 또 다른 아이슬란드 영화 <램스>를 떠올리게 했고, 내용면에서는 <브로크백 마운틴>을 떠올리게 했던 영화. 다름과 틀림이 혼재하고 점점 다양한 가치가 대두되는 시대에 나는 약자의 작은 목소리에 더욱 마음이 기운다. 듣고 싶지 않아도 쩌렁쩌렁 울리는 큰 목소리들은 지금도 충분하니까:) (그나저나 요새 보고 싶은 영화가 너무 많은데 너무 바쁘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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