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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청량리(淸凉里)발 안동(安東)행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1. 03:15
오전 7시 38분 청량리역. 부전(釜田)행 무궁화호 열차가 서서히 역사(驛舍)를 빠져나간다. 전날 수색역 근처에서 입사동기들과 짧은 모임을 마치고, 카페를 가자는 제안도 마다한 채 서둘러 본가에 갔다. 옷가지 몇 벌과 가벼운 책 두 권, 세면도구와 카메라. 단촐하게 가방을 꾸렸다. 그리고 집에서 쪽잠을 청한 나는 이른 아침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안동역에 도착하기까지는 앞으로 3시간 반 가량이 소요될 예정. 피곤에 찌든 커다란 짐짝처럼 이내 얕은 수면에 빠져들지만 이것 또한 아신역에 이르는 짧은 경춘선 구간에서만이다. 원주역에 도착하기 전 이미 눈을 뜬 나는 자세를 고쳐가며 잠을 다시 청해보지만 안동역에 이를 때까지 좀처럼 단잠은 찾아오지 않는다. 뒤이어 몇 차례 어두운 터널을 통과했다는 희뿌연 기억들과 함께 어느덧 안동역에 다다랐다. (+내가 탄 2호 차량은 얼마전 부산지역의 물난리로 인해 53번째 좌석 이후부터는 착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남부지방의 호우 소식을 뒤늦게 접했는데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실감했다..)
무료 물품보관함에 가방을 맡겨두고 안동역을 나서자, 역앞 광장의 눅눅한 공기가 훅 하고 예고도 없이 나를 덮친다. 빗방울도 아닌 이슬이 체에 거른 가루처럼 살갗에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오전 11시를 앞둔 시간, 나는 아침 겸 점심을 먹을 식당 대신 카페로 향했다. 안동 여행이라는 게 청량리역에서 열차에 탑승한 뒤에 휴대폰으로 검색해본 것이 전부라, 이날 날씨가 궂지 않다면 도산서원만 들러도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페 한 군데를 검색하다가 맘모스 제과(안동의 유명한 빵집)를 알게 되었는데, 여하간에 당장은 빵집이 아닌 카페에서 시간을 뭉개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처음 발걸음을 한 이 카페는 안동에 머무르는 동안에 매일 아침마다 비구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나의 아지트가 되었다.
카페에서 밍그적대는 동안 몇몇 여행정보를 좀 더 찾아보고서 안동역 앞에서 도산서원으로 향하는 567번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예정된 시각보다 조금 이르게 출발했고, 시내에서 도산서원까지 1시간가량 소요된다는 블로그 정보들과는 달리, 채 40분이 안 되어 도산서원 입구에 나를 내려줬다. '도산서원'이라는 표지판―아래에는 어김없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는 문구와 함께 마름모꼴 엠블럼이 들어가 있다―이 있기는 한데 어째 인적도 없이 너무 휑했다. 안내판의 화살표를 따라 아스팔트 도로를 10분쯤 걸어들어가니 이윽고 매표소(입장료 성인 800원)가 나타난다. 오전에서 오후에 이르는 하루종일 안동 지역에 비가 온다는 예보와는 다르게, 그저 비가 언제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먹구름이 꾸물거렸다.
최근 새로운 카메라―정확히는 중고 카메라―를 구입했다. 이맘때 어디든 여행을 가겠거니 막연하게 염두에 두고 초여름에 구입한 카메라. 캐논 450D를 소공동에서 구매했던 게 2009년 7월 여름의 일이니까 지금의 카메라는 만 11년간 쓴 셈이다. 어쩌다 카메라 얘기가 나오면 DSLR은 너무 무겁지 않냐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내 기준에 이 녀석은 앞으로도 5년은 더 거뜬하다. 다만 최근에 장만한 카메라는 비교적 가벼운 미러리스형에 단렌즈이고 무엇보다도 풀프레임이라는 게 가장 큰 차이인데, 이 때문에 줌기능이 있고 렌즈 호환도 가능한 오래된 카메라(캐논 450D)와는 쓰임새가 달라서 앞으로도 나름의 쓸모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한편 풀프레임 카메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동경하면서도 비싼 가격 때문에 망설였는데, 막상 확 트인 화각에 너무 많은 피사체가 담겨 처음에는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노출 조작도 낯설어서 한숨마저 나왔다. 도산서원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낙동강변의 운영대(雲影臺)와 천연대(天淵臺)를 오가며 조리개값 1.8과 8 사이에서 한참을 헤맨다. 셔터스피드와 감도는 그대로 둔 채 조리개값을 바꿔가며 구름을 이리저리 담아보는 재미를 느낄 즈음, 지금까지 사진을 제대로 찍기는 찍어왔던 건가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너무 어두운 영역이 생기는 반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다른 설정을 바꾸면 너무 밝아서 싹 휘발되어버리는 영역이 튀어나온다=_= 이는 당연한 시행착오이지만서도 그동안 빈번하게 자동모드를 켜고 사진을 너무 쉽게 찍어왔다는 자기반성이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번 여행기에서 사진의 경우 보정을 거치지 않은 사진을 남겨두는 데 나름의 의의를 두려고 한다. 나중 사진이랑 비교할 겸!)
도산서원과 낙동강변 사이의 작은 터에는 아주 오래된 왕버들이 현란한 프랙탈 패턴을 그리며 싱그러운 녹음을 사방에 뻗치고 있다. 나는 고슴도치처럼 삐죽빼죽 뻗어오른 소나무숲 아래에서 한참 카메라 시연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도산서원의 아담한 입구를 지나 역락서재(亦樂書齋)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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