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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도산서원(陶山書院)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2. 00:02
하회마을과 도산서원. 안동(安東) 하면 먼저 떠오르는 곳들이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8~9 군데였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 여러 문화재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이 목록 안에 하회마을(2010년, 하회와 양동)과 도산서원(2019년, 한국의 서원)도 포함되었다. 이 둘의 독특한 점은 전국에 산재한 유적지들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 보다 적극적으로 한국적인 가치를 발굴했다는 점이다. (2000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과 2009년 등재된 40기의 조선왕릉도 마찬가지다) 안동에는 도산서원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병산서원(倂山書院)이 자리하고 있어 함께 둘러보기에 좋다. 여기에 더해 2018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산지승원(또는 간략히 산사;山寺)까지.. 안동은 몇 백 년 전 시간의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나는 도시다.
유교(儒敎)가 그러하듯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종종 드는 생각은 우리나라의 건축물이나 학문을 보면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더 옛스러운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막상 중국을 가면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에 압도되는 것도 있지만, 의외로 엄청 오래됐다는 느낌은 없다. 대륙이라 누릴 수 있었던 자원(資源)의 여유와 다채로운 장식을 즐기는 중국인들의 성향 탓인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조선의 문화적 유산(특히 성리학)을 꼬집어서 조선이 발전 없이 답보상태에 빠져 있었다고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조선은 600년 왕조를 유지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를 조선왕조가 피할 수 없었던 귀결로 설명하는 서사(敍事)는, 어디까지나 사후(事後) 서술이라는 점에서도 어딘가 불편하다. 요는, 조선(朝鮮)이 조선답게 운영될 수 있는 원리와 사상체계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퇴계(退溪) 선생은 생전에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산서원 곳곳에는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그 사이사이마다 모란이 자리하고 있어서 봄에 와서 보면 경치가 아주 좋을 것 같다. 실은 그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공간이 서당의 담벼락 바로 바깥에 조성된 '절우사(節友社)'라는 깨끔한 화단이다. 수로(水路)를 따라 조성된 이 화단은 퇴계가 손수 화초를 길렀다는 앙증맞고 가느다란 공간으로, 요즘처럼 풀이 무성한 여름철에는 뜰이 맞닿은 산자락과 그 경계조차 분명하지 않다. 과하게 사람의 손길이 들어가지 않은 소박한 화단을 보며, 후학 양성에 여념이 없었을 퇴계가 도대체 어느 짬에 크고 작은 화초를 길렀을까 상상해본다. 뿐만 아니다. 그는 매화를 소재로 백 편이 넘는 시(詩)를 지었고, 나라의 부름이 있을 때에는 학자가 아닌 관료로 나서기도 했다. 얼마 안 있다 본인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곤 했지만 말이다. 지금이나 예전에나 천재는 다재다능한 법인가보다*-*
강학공간―선생과 제자간에 학습이 이루어지던 공간―의 가장 위에 위치한 전교당(典敎堂)에 다다랐다. 도산서원은 선조 때에 사액서원―임금이 편액(扁額)을 직접 하사(下賜)한 서원―이 되었고, 전교당 현판에 쓰인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잠시 대청에 앉아 한숨 돌리려 했는데, 전통복장을 갖춰입은 해설사가 다가와 전교당 안의 구성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유학적 이념뿐만 아니라 원규(院規)―책을 가지고 나가지 말 것 또는 여자를 출입시키지 말 것과 같이 서원을 운영하는 기본방침―도 깨알같이 한자로 적혀 있는데 설명 들은 것들이 모두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이제 좀 한숨 돌릴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오른편으로 오늘날의 교무실에 해당하는 온돌방에 걸린 흑백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한존재閑存齋>. '陶山書院'이라는 한석봉의 글씨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글자가 적혀 있다. 너무 사무적이지도 않고 권위적이지도 않은 센스 있는 작명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이후에도 병산서원(倂山書院)과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차례차례 방문하면서 느끼는 것이, 어린 유학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이름을 다는 것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는 점이다. 편의상 동재(東齋)―상급생이 기숙하는 동쪽의 공간―와 서재(西齋)―하급생이 기숙하는 서쪽의 공간―로 통칭하기는 하지만, 실제 현판에는 각각 '박약재(博約齋)'와 '홍의재(弘毅齋)'라는 이름을 정성스레 붙여놓았다. 이처럼 공들인 공간에서 철부지 꼬마 유생들이 천진한 목소리로 경전을 읊었을 생각을 하니 어쩐지 미소가 지어진다. 다만 강학공간과 성격을 달리하는 제향공간―유명한 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거행하는 공간―에 해당하는 상덕사(尙德祠)만큼은 별도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어서, 제례가 없을 때에는 일반인에게도 공개가 되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상덕사와 전교당 사이에 가로놓인 오죽(烏竹)이 상덕사에 신비한 분위기를 더한다.
한국철학이란 무엇일까, 종종 생각을 한다. 한국사, 한국문학은 들어봤는데 '한국철학'이라는 건 내게만 그런 건지 표현부터가 어색하다. 보통은 동양철학으로 퉁쳐지는 동아시아의 철학 안에서 한국철학의 명맥은 어디쯤, 어떻게, 누구에 의해 흐르고 있을까. 늘 등잔 밑이 어둡다. 우리의 행동과 사고에는 서구의 세계관이 깊숙히 들어와 있지만, 그렇다고 그걸 의식하고 살아가진 않는다. 세계를 선과 악의 대결로 바라보는 서구적인 세계인식이, 음과 양의 조화로 이해하는 동양적인 세계인식보다 더 편한 것도 사실이다. 음양(陰陽)을 얘기하기 시작하면 뜬구름잡는 느낌부터 먼저 든다. 어벤져스가 타노스를 무찌르는 장면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것도 마찬가지.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개화기의 이념은 온데간데 없이 서도서기(西道西器)만이 남은 건 아닐까. 그래서 도산서원을 다 둘러봤다고 생각했을 때, 마지막으로 현대식으로 지어진 옥진각(퇴계 이황의 생애와 사상, 유물 등을 소개하고 전시해놓은 공간)에 들른 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기론(理氣論)은 주자학의 핵심을 이루는 사상체계이지만 내게는 여전히 너무나도 윤곽이 잡히지 않는 모호한 개념이다. 이(理)는 자연의 본질적인 성질이고 여기서 기(氣)라는 탁한 성질이 파생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서양고대철학에서 말하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는 또 다르다. 언뜻 이기론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이데아(절대적이고 완전한 이상)와 현상 세계(불완전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를 풀이해놓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점점 파고들어가보면 그런 서양철학의 이분법과는 맥이 전혀 다르다. 이황과 기대승이 벌였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에서도 드러나듯, 이(理)와 기(氣)는 양방향적이고 어떤 때는 우열(優劣)을 가를 수 있는 성질도 아닌 듯하다. 태극(太極) 문양처럼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는 가운데 끊임없이 모양을 달리 하면도 동시에 같은 모양을 유지하는 알쏭달쏭한 개념(槪念).
어쨌든간 가끔 어떤 상황에서는 서구적인 세계관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서양철학이 설명하는 틀 안에서 피아(彼我)가 명료하게 나뉘고 좋고 나쁜 것이 분명하다면 모든 것이 참 쉽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상과 인식은 아주 복합적인 조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어쩌다 우연에 가깝게 서양철학이 통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비록 점점 균열이 보이고는 있지만) 인간이성에 강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라 확신하는 지금의 시대. 지구의 인구가 100억에 이르고 지금의 소비가 시들해진다면 우리는 또 다른 세계관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은 선사시대와는 다른 의미에서 생존을 위해 새로운 사고방식을 개발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몇몇 단상(斷想)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동양철학(또는 한국철학)이라는 연못 안에 물음표라는 동심원을 띄우며 도산서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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