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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다시 첫 번째 질문으로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7. 31. 11:37
안동에 간 기간은 한창 장마철이었다. 주간예보에는 비내리는 먹구름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예보를 보수적으로 하는 탓인지, 오전에는 주룩주룩 비가 왔다가도 해가 높아지는 낮이 되면 가랑비가 오락가락 하는 정도의 흐린 날씨였다.
안동에 도착하고 나서 처음 사흘간 심한 악몽에 시달렸다. 가깝지도 않은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느라 초조한 내 모습,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자꾸 무언가를 하라고 해서 잔뜩 화난 내 모습, 옷을 모조리 빼앗겨 벌거숭이로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아 수치스러워 하는 내 모습, 모임에 도착했는데 어디에도 낄 곳이 없어 우왕좌왕하는 내 모습.
안동으로 향한 데에 별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떠나야 했을 때 가본 적이 없었던 곳이 안동이었을 뿐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것이 안동뿐만은 아닌데 그럼에도 안동을 택한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그냥 지도에서 가장 텅 빈 공간을 찍었기 때문이다. 강릉과 대구 사이,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이 갈라져 나오는 곳.
안동에 오기 전 장마를 앞둔 여름하늘은 아름답다 못해 장엄했다. 하늘은 지평선에 가까워질 수록 의미심장한 장밋빛을 띠고 있었고, 덩달아 구름도 조화로운 음영(陰影)을 이루고 있었다. 그 밑으로 그늘진 두 개의 산등성이가 불쑥 시야에 들어왔을 때, 모든 것을 산산이 흩어버리겠노라 생각했다, 부숴버리겠노라 생각했다.
뒤이어 떠오른 것은 첫 번째 질문이었다. 신(神)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것이 단 하나일지 여럿일지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평소 무수히 많은 물음표를 떠올리면서도 하나의 물음표로 수렴시키지 못하는 나를 보며, 내 삶의 단초(端初)가 무엇인지 끝까지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돌아온 지금, 점점 물음표는 늘어나고 그것마저 흔들리는 느낌이다. 서울에 올라오는 길에 장마는 걷혔지만, 열차에 내려 승강장 위에 올라서니 휴대폰에 시선을 빼앗긴 무표정한 군상을 보며 머릿속에 다시 먹구름이 끼는 듯했다. 갑갑함과 무력감. 겉보기에 아무렇지 않은 일상도 생각보다 아슬아슬한 균형점 위에 놓여 있다.
목표(目標). 옛날 사람들에게는 평생에 하나(순례라든가) 또는 한 해에 하나(풍년이라든가) 정도이던 목표가 오늘날에는 주 단위, 일 단위로 바뀐다. 그렇다고 사람이 그런 속도로 대단한 진화를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짧고 가쁜 호흡. 이러한 호흡의 리듬 속에 내가 향하는 목적지는 어디인가? 이러한 나의 질문은 결코 현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일 수 없다.
물음표의 연장선상에서 토막토막 여행기를 기록해보려고 한다. 총총(悤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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