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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마을 안을 향해(하회종가길을 따라)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24. 02:07
이후의 하회마을 구경은 빠른 호흡으로 이어졌다. 하회마을의 남촌 지역을 구경하는 것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곧장 하회마을의 안쪽 깊숙이 들어갔다. 풍산 류씨의 큰 종가집이라고 하는 입암고택(立巖古宅)과 충효당(忠孝堂)을 차례차례 지나 신목이 자리한 삼신당 방면으로 진입했다. 시골에 가면 논밭 한가운데 마을 초입을 지키는 아름드리나무를 보는 일이 있다. 이 나무는 바로 그런 나무다. 삼신당(三神堂)은 말 그대로 세 신(神)을 모시는 공간인데 하회마을 심장부에 위치한 이곳을 하당(下堂)이라 일컫고 나머지 중당(中堂)과 상당(上堂)은 화산(花山)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화산을 지나쳐 오면서도 나머지 두 그루의 신목은 보지 못했다.
이곳은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신(神)’이라는 친숙하지 않은 글자가 여기저기 눈에 띄니까 좀 으스스했다. 우리나라에서 신(神)이라는 것은 다른 세계적인 종교들과 달리 대체로 애니미즘과 결부되는 것 같다. 삼신당 앞으로는 입을 쩍 벌린 키작은 정승이 흰 고깔을 쓴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신목 가지마다 소원을 적은 하얀 기름종이가 가득히 묶여 있었다. 나도 짧은 문구를 적어 나무에 꽁꽁 묶어보았다. 수령(樹齡)이 600년이 넘었다는 이 나무를 반시계 방향으로 빙 둘러본다. 좁은 길목을 통과할 때까지는 나무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큰 나무가 마을 중심에 솟아올라 있다는 게 놀랍다.
삼신당을 빠져나와 원형으로 가지런히 다듬어진 소나무를 지나 끝으로 원지정사를 들렀다. 이곳은 하회마을로 낙향(落鄕)한 류성룡이 16세기 후반 서재 목적으로 지었고, 요양하는 장소로도 쓰였다고 한다. 안에는 연좌루라는 누각이 있어서 위에 오르면 하회마을을 휘감는 낙동강이 훤히 보인다고. 하지만 누각은 올라갈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부용대가 아닌 연좌루라면 낙동강이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머릿속으로 잠시 그려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원지정사의 나무들은 유달리 먹처럼 시커매서 선비의 이미지―벼루와 연적―가 결부됐다. 이제는 되돌아갈 시간. 원지정사의 문턱을 나서며 출발지점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셔틀버스를 타고 매표소까지 이동한 다음 안동 시내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하회마을 자체는 7시까지 둘러볼 수 있지만 매표소와 주변의 매점은 6시가 되니 이미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삼신당을 빠져나올 때부터 빗줄기가 꽤 굵어져 있었기 때문에 얼른 안동 시내로 돌아가고 싶었다. 한국인처럼 옷을 입은 중국인 두 명과 버스정류장에서 20분 가량 기다렸다. (잠깐 요즘 같은 시국에 외국인이 어떻게 관광올 생각을 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오전부터 내내 내게 들러붙던 끈적끈적한 여름공기는 버스에 탑승한 뒤에도 달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험상궂어지면서 안동 시내에 내렸을 때는 이미 주위가 매우 어두워져 있었고, 우산을 써도 비를 피하기 어려웠다.
저녁은 첫날 안동국밥을 먹기 위해 들렀던 식당에서 석쇠불고기(언양 불고기와 비슷했다)와 된장찌개를 먹었다. 오른편으로는 흑인 한 명과 라틴계 외국인 한 명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어쩐지 미군이거나 군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같았다. 왼편으로는 격투기를 할 법한 다부진 체격의 남성이 혼자 술을 마시며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일행 두 명이 합류했다. 바로 옆테이블로 두 명의 일행이 자리를 잡을 즈음, 속을 든든히 채운 나는 자리를 일어났다. 두 번째 발걸음을 한 이 식당은 이것이 마지막 방문이었고, 가게를 나서며 바라본 세 번째 저녁하늘은 유달리 일찍 어두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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