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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병산서원(屛山書院)과 배롱나무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10. 00:06
병산서원을 경유하는 하회마을 행 버스는 하루에 다해서 세 대가 있다. 지도상으로 봤을 때 병산서원을 경유한 다음에 하회마을을 들어가기가 어려워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하회마을을 먼저 들어갔다가 회차하여 다른 길을 통해 다시 병산서원으로 들어간다. 이날도 어김없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11시에 맞춰 교보생명 앞으로 갔다. 교보생명은 안동역에서 가깝기도 하고 안동 시내에서 가장 많은 버스가 다니는 정류소다.
전날 청송 주왕산을 가기로 하면서 안동 여행에 대한 정보를 짧은 시간에 이것저것 취합을 하다보니, 여행 셋째날부터는 대충 어떤 것들을 둘러보면 좋을지 윤곽이 그려졌다. 문제는 장마라는 날씨가 큰 변수였는데, 한밤중에는 장대비가 쏟아지다가 아침이 되면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낮에는 볕도 뜨고 여우비가 내리니 몇 시간 뒤의 날씨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가늘게 비가 오기는 오는데 매미울음은 멈추지 않는 그런 날씨였다. 그럼에도 일기예보에는 24시간 비구름으로 꽉 차 있었고, 왠지 느낌상 이튿날은 대낮에도 비가 많이 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3일차에 서둘러 하회마을 일대를 둘러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도산서원을 둘러본 터라 병산서원을 가는 게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가, 뒤늦게 병산서원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포함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반드시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산서원을 갈 때도 그랬지만, 하회마을로 가는 246번 버스도 국도를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서 채 한 시간이 안 되었는데도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문제는 전날 과식을 한 탓인지 배탈이 났는데, 하필이면 하회마을을 찍고 나온 버스가 이제 병산서원으로 들어서는데 그 길이 비포장도로였다. 경상도 지역이 한바탕 장마를 치르고 있던 시점이라 그렇지 않아도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는 곳곳이 깊숙이 패여 있었다. 속도를 내지 못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양방향으로 차가 지나가기도 어려울 만큼 폭이 좁아서 한 대의 차량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는 과정에서 버스는 수도 없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이런 곳도 구글맵에 길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구나, 예전에 비수구미 가는 길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목적지가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병산서원은 따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안내소를 지나 5분여 지나가면 병산서원이 나타난다. 병산서원은 도산서원만큼 아기자기한 멋은 없지만, 터가 아주 좋다. 물론 도산서원도 낙동강을 앞에 두고 배산임수를 취하고는 있지만, 병산서원에서는 낙동강이 정말 가까이서 보인다. 또한 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는 이름 그대로 정면에는 병풍을 두른 듯 산줄기가 오르내리고 있다. 습도에 짓눌려 산의 초록빛은 약간 탁해져 있기는 하지만, 여름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낙동강은 지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로 인해 수면이 황톳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배롱나무. 병산서원이라면 배롱나무를 빼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언뜻 보아도 관상용으로 심은 어린 나무들이 아니다.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서원과 함께 오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병산서원의 정문인 복례문을 지나 마주한 누각(만대루)은 확실히 도산서원의 누각보다 탁 트인 느낌이 있다. 누각을 떠받치고 있는 두꺼운 나무기둥들에서는 오래되다 못해 노장(老將)의 과묵함마저 느껴진다. 도산서원을 둘러볼 때 학습이 이루어지는 전교당(도산서원의 중앙강당)의 계단은 학생들이 방심하지 않도록 일부러 가파르게 설계했다는 설명을 귀동냥했었는데, 병산서원의 중심공간인 입교당의 돌계단도 상당히 가파르다. 그리고 대칭을 이루는 두 계단 사이로 무궁화 나무가 연분홍 꽃을 피우고 있다. 마루에 오르니 만대루와 그 너머의 낙동강이 시야에 꽉 차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도산서원 때도 그랬지만 서원이라 그런지 어린 아이들을 대동한 부모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중에서는 프랑스에서 온 가족도 있다. 약간 자긍심 같은 걸 느꼈다. 물론 그들도 그들의 화려한 유산들에 대해 자긍심이 있겠지만.
병산서원의 제향공간인 존덕사는 도산서원의 상덕사가 그랬듯 제례가 거행되지 않는 기간에는 개방을 하지 않는 듯하다. 신문(神門)이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다. 결국 내가 향할 수 있는 곳은 존덕사보다 한 층 정도로 높이가 낮은 곳에 위치한 고직사다. 고직사는 병산서원을 관리하던 사람들의 거처로 중요성은 떨어지지만, 의외로 숨어 있는 보석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배롱나무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고, 작은 흙마당은 정감 어린 돌담과 기와장식으로 예쁜 느낌이 있다. 아직 배롱나무가 완전히 다 피지는 않았는데, 배롱나무의 분홍빛은 사람뿐만 아니라 곤충의 시선도 잡아끄는지 어떤 경우에는 배롱나무가 하나의 아름다운 벌집(;;)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내게는 그런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 나무인데, 어쨌든 화려하고 아름다운 멋이 있는 나무다.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을 이어주는 버스가 하루에 세 대밖에 없다보니, 병산서원을 다 둘러보고도 버스가 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병산서원과 하회마을은 직선거리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그 가운데 야트막한 산이 있다. 다행히 이 산을 가로질러 하회마을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비로 인해 진흙길이 되었다면 좀 걷기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버스가 올 때까지 한 시간여를 기다리는 대신 걸어서 하회마을에 가보기로 했다. 사실 뚜벅이 여행자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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