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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물안개 속 산행(A walk in the drizzle)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8. 12:50
산모기가 출몰할 때부터 알아차려야 했던 건데, 주봉까지 오르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후리메기 삼거리를 지나 등산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에, 무리한 산행을 자제하라는 살벌한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개울을 지나 산길에 접어들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집요한 산모기도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대신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점점 주위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작년 늦가을에 찾았던 간월재의 기억이 떠올랐다. 억새 광경을 보러 갔다가 자욱한 안개 속에서 컵라면을 먹고 되돌아 왔던 기억. 차이라고 한다면 당시는 으슬으슬하게 몸을 적시는 안개가 끼었다면, 지금 안개는 서늘하고 시원한 느낌이 있었다. 어쨌든 안개가 끼면서 주위를 둘러보기가 어렵게 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어느 순간부터 후두둑후두둑 가볍게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나뭇잎들이 단단히 지붕을 이어주어서 우산을 꺼내지 않아도 된다. 빗방울이 잎에 와닿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한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용케 쉬지 않고 한 번에 주봉을 주파했다. 그런데 이런 산봉우리는 또 생소한 것이, 꼭대기인데도 이렇다 할 전망이라는 게 없다. 널따란 바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방을 키 작은 소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시야가 탁 트이는 곳이 전혀 없었다. 그저 ‘주봉’이라고 적힌 한글비석만이 여기가 산꼭대기라는 걸 가리킬 뿐이었다. 그 시간에 정상에 있는 사람도 나뿐이라서 벤치에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내리막길로 향했다. 소나무만큼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다.
내리막을 걷는 길에는 반대 방면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과 드문드문 마주치며 인사했다. 칼등고개(내가 오른 코스)가 부담스러워서 아무래도 반대방면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았던 걸까. 산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건 똑같은 높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를 때는 그렇게 힘겨웠던 것이 내려갈 때에는 아주 홀가분하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하산할 때 방심을 하는 경향이 있다보니 많은 부상이 산을 내려가는 길에 발생한다. 산을 오르려고 아등바등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내려오는 길도 조심스럽게 내려와야 하므로 마냥 쉬운 길은 아니다. 인생도 이런 것일까. 극한의 산행을 찾는 히말라야의 산악가들은 등산에서 도대체 무엇을 구(求)하는 것일까, 잠시 생각이 스친다.
내리막길에는 군데군데 전망대가 있어서 심심하지 않았다. 스쳐 지나온 장군봉과 병풍바위까지 경치가 장관이다. 안개가 낄 때부터 일대에 먹구름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도 반대방면에서 산행을 시작했더라면 좀 더 맑은 파노라마를 먼저 감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전날 들렀던 도산서원도 그렇고, 이곳 일대가 가을에 오면 정취가 색다를 것 같은데, 그러자면 수많은 인파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3시간 남짓한 주봉코스 산행을 마치고 안동으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에 올라탔다. 이 지역 사투리를 쓰는 기사 아저씨의 말투가 아주 괄괄하다.
안동에서 청송으로 올 때와는 달리 청송에서 안동으로 갈 때에는 안동초교에서 내렸다. 안동초교 바로 뒤에는 찜닭골목이라고도 하는 구시장이 들어서 있다. 산행을 했으니 샤워를 하고 개운한 기분으로 다시 나올까 하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걸 보고 빨리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가는 걸 택했다. 예상했지만 1인분 단위로 음식이 나오지는 않았고, 맥주와 함께 갈증을 가라앉히며 먹을 만큼 음식을 먹고 식당을 나왔다. 하지(夏至)를 넘겼지만 아직 체감할 만큼 해의 길이가 짧아지지 않은 한여름 장마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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