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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날. 무너진 것을 바로잡다(旣廢之學 紹而修之)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8. 30. 00:58
열차를 탈 때는 지하철을 탈 때에는 느끼기 어려운 재미가 있다. 가끔씩 나타나는 역(驛)이 반갑기도 하고―어떤 역은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역과 역 사이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청량리에서 중부선을 타고 안동으로 오는 동안 느꼈던 것은 경상북도 내에서도 북부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강원도만큼이나 산이 참 빽빽하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날은 안동역을 이용하는 날이다. 소수서원을 가기 위해. 뚜벅이 여행자에게 영주 여행이 편리한 점 하나는 소수서원과 부석사가 서로 멀지 않고, 같은 버스 노선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소수서원이 먼저 나타나고 부석사는 사찰이 만큼 산 안까지 조금 더 들어가야 한다) 이제 고민을 해야 할 것은 버스를 타기 위해서 어느 역에서 하차하느냐 하는 것. 버스는 풍기역과 영주역 두 곳 모두 들르는데, 안동역에서 풍기역까지 거리가 더 짧으므로 나는 풍기역을 이용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영주역을 이용했는데 영주역으로부터 버스정류장까지는 걸어서 이동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이므로 풍기역을 이동하는 것이 여로모로 편리하다.)
안동역을 출발한 열차는 채 30분이 안 되어 풍기역에 도착했다. 가끔 이게 있기는 있는 지명(地名)인가 하는 곳들이 있는데, 풍기인견과 풍기인삼 같은 명칭이 그렇다. 이곳 풍기는 비단과 인삼이 유명한 곳이어서 역에서 내리자마자 이 두 가지 특산물을 홍보하는 문구가 많이 보인다. 정류소는 역을 나서자마자 있고, 거리에는 인적 없이 정적만 흐른다. 정류장 바로 옆에 식당이 있어서 점심을 먹을까 고민했는데, 전광판에 버스 도착시간이 확확 줄어드는 것을 보니 버스를 기다리는 게 나을 듯싶었다. 시계가 7분이 지나기도 전에 도착예상시간이 7분씩 줄어드는 것을 보면 버스기사 아저씨가 어지간히 악셀을 밟는 모양이다. 버스를 놓치고 1시간 넘게 기다리는 것보다는 버스를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소수서원 역시 병산서원과 마찬가지로 따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서원으로 이어지는 길 양옆으로 펼쳐진 소나무들이 아주 씩씩하고 건강한 색을 띠고 있었다. 학자수(學者樹)라고 해서 선비를 닮은 나무라고 하는데, 서원의 입구인 진도문(進道門)에 가까워지니 과연 서원을 향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 소나무들이 보인다. 소수서원은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을 남북으로 나누는 일반적인 서원과는 다르게, 이 두 공간이 동서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영귀봉(靈龜峰)이라는 야트막한 둔덕을 오르면 서쪽으로 제향공간이 살짝 보인다.
소수서원이라고 하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라는 타이틀이 항상 따라붙는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공부할 때도 별 생각없이 외웠던 내용들인데, 나중에 박물관을 들러서 ‘소수(紹修)’의 의미를 깨닫고 좀 멋지다고 생각했다.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에 했다.” 옛날 사람들에게 무너진 학문 또는 망가진 세계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가 지금의 세상이 혼란스럽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소수서원이 세워지고 사액서원이 된 것이 16세기 중반의 일이다.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서원을 세웠는데, 이곳에 배향된 문성(文成)은 고려시대의 문신인 안향(安珦)이다. 정확히는 원(元)의 지배를 받던 고려 말기(13~14세기)에 활동했던 인물이니까 소수서원의 이야기는 더욱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세의 지배를 받던 난세에 성리학을 고려에 들여오고 후학을 양성하는 건 어떻게 가능했을까. 세상이 어지러워도 어떤 뜻들은 살아남아 이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만 보던 유적지를 왔다고 해서 갑자기 감탄사가 나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으로 익히 접해서 그런지 ‘백운동’이라는 현판을 봐도 별 감흥이 들지 않는다. 소수서원이라고 적힌 검정 바탕의 사액현판은 그래도 좀 멋스럽다고 생각했고, 되돌아 생각해보면 사실 서원에 들어서면서 봤던 소나무숲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하회마을을 다녀온 뒤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소수서원은 강학당이 아니라면 살림집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소수서원은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이 취하고 있는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다르게 건물이 놓여 있다. 그러니까 학습이 이루어지는 강학당을 중심축으로 어느 정도 대칭을 이루고 있는 보통 서원의 모양이 아니다. 딱히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고, 산자락과 바로 옆에 흐르는 죽계(竹溪)의 방해를 피하는 정도로만 건물을 들여 놓은 것 같다. ‘직방재’와 ‘일신재’로 현판은 나누어 걸었는데도 건물이 사실상 한 채로 연결돼 있거나, 학생들이 기거했던 지락재의 경우는 마루를 크게 터놓아서 어딘가 평범하지는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소수서원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선비촌이라고 해서 고택이 모여 있는 곳이 있는데, 이미 하회마을을 둘러봤으므로 이쯤에서 만족하고 소수서원 구경을 마쳤다. 버스 시간을 염두에 두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확인을 해보니 다음 버스까지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풍기역에서 점심을 못 먹었기 때문에 마침 서원입구 맞은편으로 딱 하나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며느리로 보이는 여성은 어색함 없이 표준말을 쓰고, 나이 지긋한 할머니는 사투리를 쓰셨는데, 할머니는 내게 식사를 내오신 뒤에도 몇 번이나 면(麵)이 모자라지 않냐고 물어보셨다. 식사를 다하고 나니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라며 버스가 오기 전까지 차양 아래에서 비를 피하라고 안내해 주셨다. 그러더니 커피를 훌쩍이며 휴대폰으로 한참 통화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번에는 곧 버스가 올 것 같다며 등을 톡톡 치신다. 다감한 할머니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정류장 표시도 시간표도 없는 도로 위에서 부석사행 버스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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