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째날. 부석사(浮石寺)여행/2020 장마 안동 2020. 9. 9. 13:13
버스에서 내린 종점 회차지에서부터 부석사의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은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유원지 같은 느낌이었다. 주차자에는 차가 거의 없고 식당들은 모조리 문을 닫았다. 그나마 부석사를 찾은 몇몇 방문객만이 풍경에 활기를 불어넣지만 갈곳을 헤매는 행락객 같기도 하다. 코로나에 이례적으로 긴 장마까지 가세해 원래 움직이던 모든 것들을 멈추게 만들었다. 정지화면을 보는 것 같은 이때의 광경은 이날 저녁에 찾은 청년몰(안동의 신시장 일부)에서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일주문을 통과해 조금 더 걸으면 예의 당간지주가 나온다. 소수서원에 남아 있던 당간지주가 옛 사찰의 흔적을 증언했듯이, 천왕문을 앞두고 대칭형의 당간지주가 왼편의 우거진 나무 사이로 살짝 모습을 숨기고 있다. 대단한 기계도 없던 시절에 이 만한 돌은 어디서 구해서 이런 산중턱까지 끌어다 놓았을까, 그리고 끌로 표면을 다듬기 위해서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물음표가 떠오른다. 가파른 돌계단을 지나면 천왕문 앞에 다다르고, 천왕문을 넘어서면 비로소 천상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천왕문 안에는 네 명의 천왕(天王)이 비치되어 있고 각각은 보검(寶劍), 비파, 용과 여의주, 보탑(寶塔) 따위를 들고 있다. 부리부리한 눈을 보면 과장되었다고 느끼면서도 어릴 적 시골의 외딴 화장실에 가기 두려워했던 것처럼 조금 마음이 위축된다.
그러고도 이백 보 가량은 더 걸어 다시 한 번 돌계단을 올라야 천상이라 할 만한 장소에 다다른다. 천상으로의 진입을 호락호락하게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회랑을 넘어가는 마지막 문턱이 높다. 하지만 문턱으로 놓인 나무의 굴곡진 결 때문에, 발걸음에 신경을 써야 하는 수고보다도 나무의 자연스러운 곡선에 더 관심이 쏠린다. 그리고 정면에는 범종각(梵鍾閣)이 양옆에 크고 작은 부속건물―이 건물들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것들이다―을 완벽히 대칭형으로 거느리고 있다. 또한 동서로는 석탑을 두고 있는데, 단풍나무, 소나무, 수국, 나리, 무궁화 등이 각자의 색깔로 무채색의 화강암, 기와, 어두운 목재 사이에서 시선을 흩뜨렸다.
범종각에 오르는 길만으로도 구도가 충분히 멋있었기 때문에 이 누각만 지나면 곧바로 무량수전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정북(正北)으로 조금 꺾인 방향으로 안양루(安養樓)가 나타난다. 안양루로 오르는 가파른 돌계단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사다리꼴 모양의 단촐한 뜰이 펼쳐진다. 좀 전보다는 적은 수의 소나무, 오래된 돌조각이 범종각의 양어깨에 걸쳐진 취현암, 의향각과 더불어 긴장감을 누그러뜨렸다. 범종각을 지나치면서도 느꼈지만, 나무가 굉장히 오래되었다. 몇 차례 중건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기미를 바싹 마른 나무들은 너무나 오래 되어서 시간을 홀대하는 분위기마저 풍겼다. 완전히 습기를 빼앗겨 촘촘히 벌어진 나무들은 여름의 곰팡내 나는 습기도 숱하게 견뎠을 것이고, 가을의 선선함이 가시기도 전에 겨울의 변덕도 참아야 했을 것이다.
천왕문에서 범종각, 안양루, 무량수전으로 이루어지는 중심축은 비교적 나중에 지어진 부속건물과 대비되면서 무게감을 뻗어나갔다. 안양루(安養樓). 소백산맥에도 운무가 가득 낀 흐린 날씨였기 때문에, 안양루의 먹빛 실루엣이 유독 도드라졌는데, 범종각에 비해 체격이 한참 작은데도 불구하고 야무지게 뻗어나간 처마의 선이나 기와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추녀와 처마, 서까래의 다채로운 선이 기개(氣槪)가 있다.
그리고 마침내 무량수전(無量壽殿). 안양루 곁의 석등을 살짝 돌아가면 무량수전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두 자씩 세로로 쓰여진 현판이 동양적인 느낌을 준다. 다포 양식에 비해 단촐한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있는데, 바로 그 간결함 때문에 원시와 문명 사이에 걸쳐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중세의 단순성을 벗어나려다 그대로 번데기 안에 갇힌 어린 생명처럼 무량수전은 우직하게 서 있다. 그래서 투박한 처마의 선도 채 감추지 못한 채, 아이의 눈동자처럼 숨길 것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무량수전을 정면으로 왼편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바위가 있고, 오른편으로 지층으로 된 단 하나를 오르면 삼층석탑이 하나 더 있다. 그리고 석탑 뒤로 난 길은 조사당으로 이어지며, 조사당 앞에 가면 화엄종을 창시한 의상대사의 설화를 간직한 꽃이 있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나와 석등을 빙글빙글 돌며 무량수전과 안양루를 오가고, 용의 척추처럼 뻗어나가는 소백산맥을 꼼꼼히 뜯어보다가 그 길로 부석사를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은 올 때(27번 버스)와 달리 55번 버스를 탔다. 버스는 풍기군을 거치지 않고 곧장 영주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갈림길이 나타나는 지점에서 버스는 노곡리가 아닌 우곡리로 빠져 수직으로 하강하듯 직선에 가까운 도로는 정남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올 때와 달리 얕은 개울이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풍경이었다.
'여행 > 2020 장마 안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pilogue. 다음 행선지 (0) 2020.09.12 다섯째날. 무너진 것을 바로잡다(旣廢之學 紹而修之) (0) 2020.08.30 넷째날. 봉황이 머무른 자리(鳳停寺) (0) 2020.08.25 셋째날. 마을 안을 향해(하회종가길을 따라) (0) 2020.08.24 셋째날. 마을 바깥길로부터(하회남촌길을 따라) (0) 2020.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