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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共有)하지 못한 여인들일상/film 2016. 9. 23. 00:03
<플라워/혼 가라뇨, 호세 마리 고에나가/드라마/나고레 아란부루, 이치아르 아이즈푸루, 아네 가바레인/99>
오랜만에 보는 스페인영화다. 즉흥적으로 예매해서 극장을 갔는데, 알고보니 간 날이 스페인 영화제의 개막일이었다. 몇몇 스페인사람들이 무리지어 오고, 주한 스페인 영사까지 와서 환영사를 했다. 웬 미남이 스크린 쪽에 계속 서있나 했는데, 운영진에서 영사님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다면 그냥 스페인에서 온 잘생긴 사람 정도로 알았을 뻔했다;; 심지어 젊어보였는데 영사라니 좀 부럽기도 하고.. 여튼 스페인 영화라고 소개는 했지만, 정확히는 바스크 지방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바스크 지방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빌바오의 구겐하임 뮤지엄이 위치한 그 일대의 지역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카탈루냐 지방만큼 스페인 내에서도 경제적으로 부강한 지역이고, 꾸준히 스페인 중앙정부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곳이다. 여튼 카탈루냐어는 스페인어랑 비슷하기라도 하지, 바스크어는 아예 다른 언어라서 귀에 익은 스페인어와 비교해서 어감도 완전히 달랐다. 스페인에서 온 사람들도 영어자막을 참고해야만 했다고...(물론 한글자막 또한 따로 있었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한 시간 반 정도이지만 굉장히 밀도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고요한 수면 아래로 거센 물살이 흘러가는 것처럼 줄거리가 빈틈없이 전개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던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소재가 참 특이하다는 것이다. 특히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가진 직업은 크레인 기사, 공사현장의 총무, 톨게이트 직원 등등 좀처럼 주인공의 직업으로는 떠올리기 힘든 소재들이다. 그런데 또 이런 직업적 배경들 간에 교집합을 만들어놓아서, 조금은 미스터리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우리나라로 공식적으로 수입되어 상영될 예정이라니 미리 많은 것들을 언급하기는 그렇지만,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의 중심소재는 '꽃'이다. 꽃의 제공자는 한 명이지만 꽃에 얽힌 여인은 세 명이 등장한다. 그런데 꽃을 해석하는 세 여인의 관점이 서로 다르다. 그런 면에서 일본영화 라쇼몽(羅生門) 같기도 하다. 문제는 서로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합의점을 찾아야 할 세 여인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극적인 화해의 계기가 마련되지만, 결국 세 여인은 각자의 삶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모호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영화에서 꽃을 제공하는 남자의 역할은 세 여인간의 애증, 시기, 질투, 갈등을 증폭시키는 원인제공자이기도 하지만,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관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크레인 기사인 남성이 높은 크레인에 혼자 앉아 있는 동안, 지루한 틈을 타서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대상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마지막에 망원경에 항상 포착되는 것은 공사현장 너머 목장에서 떼지어 몰려다니는 양들이다. 그리고 남자가 교통사고를 겪는 순간에는, 목장에서 탈출한 양 한 마리가 유유히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빠져나간다. 여기서 '양'과 '도로'라는 것은 영화 안에서 삶과 죽음에 관하여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걸어가는 삶의 여정에서 모든 깨달음과 모든 사건의 발생은 '도로 위'에서 이루어진다. 여인1이 꽃을 놓아두러 갈 때마다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 여인2가 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여한 날 뜻밖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것, 그리고 영화의 종반부에 도로 위에서 양을 들이받는 사건에 이르기까지...도로는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과 개인을 이어주는 네트워크다. 의과대학에 남성의 신체가 기부되어 있던 5년의 유예기간 동안, 세 여인은 도로라는 네트워크망 안에서 간헐적으로 소통하고, 삶을 관조하고, 상실에 대해 괴로워한다. 그렇게 계속해서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간다. 차에 치이고도 다시 땅을 디디고 일어나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양'은 아마도 그러한 삶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너무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을 쓰다보니 글이 두서없이 쓰여진 것 같다. 나름 느낀 바만 적는다고 적었는데, 대충 봐도 스포일성이 매우 짙은.....;;;(항상 짙었었나..;;;;;;;;) 여튼 개봉일정이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볼만한 영화인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스페인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들 또한 최근에 제작된 작품 중 선별한 것들이라고 하니, 한 번쯤 들러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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