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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의 순례일상/film 2016. 9. 12. 02:05
<다음 침공은 어디?/마이클 무어/다큐멘터리/119>
<뉴스룸>이라는 미국드라마를 보면 첫 화(話)의 도입부에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인 남자 앵커(윌 맥어보이)는 어느 한 강연에 초청되는데, "왜 미국이 가장 위대한 국가인가?"라는 어느 여대생의 질문에, "미국이 위대한 국가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단칼에 딱 잘라 답한다. 앵커의 답변은 '위대한 국가'라 일컬어지기에는 초라한 미국의 여러 지표들, 특히 삶의 질과 관련된 형편없는 성적표에 근거한다. 아무리 유수의 대학이 모여 있고 첨단 과학기술이 융성하는 미국이라고는 해도, 평균적인 교육수준과 복지수준의 중간값을 놓고 보자면, 서유럽 국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고 더러 개발도상국가와 비교되는 것이 사실이다. 정곡을 찌르는 앵커의 답변에 얼음장을 끼얹은 듯 좌중의 분위기는 숙연해지고, 덩달아 앵커의 양 옆에 앉아 있던 공화당쪽 논객과 민주당쪽 논객도 할 말을 잃는다.
같은 맥락에서, 마이클 무어는 미국이 세계 제일인자임을 자처하면서도 갖추지 못했던 것을 찾아나서기 위해 유럽 순방에 나선다. 마이클 무어가 탐방하는 나라는 떠오르는 대로 다음과 같다.
서유럽/중부유럽 : 프랑스, 독일, 슬로베니아
북유럽 :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남유럽 : 이탈리아, 포르투갈
특이하게도 북아프리카 : 튀니지(여기에 빠진 국가 있을 수 있음..)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터진 뒤, 유럽에도 경제한파가 들이닥쳤고 여전히 많은 국가가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만큼, 영화에 소개되는 모든 국가들의 경제상황이 양호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마이클 무어가 영화의 서두에서 밝히듯, 그가 순방하는 국가들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꽃'이지 '잡초'가 아니다. 어찌 됐든 미국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라면, 설령 그곳이 잡초 섞인 곳일지언정 한 송이 꽃을 꺾기 위해 기꺼이 방문하겠다는 것이다. 그 '꽃'이라 함은 교육, 복지, 노동, 인권, 여권(女權), 아동문제, 역사인식을 아우르는 매우 포괄적인 대상이다.
한 가지 좀 의외였던 사실은, 영화에 프랑스도 나오고 독일도 나오는데, 불과 몇 개월 전까지 EU의 3대 지분을 나눠 가졌던 영국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에게는 어머니의 나라와도 같은 곳이 아닌가. 브렉시트가 경제불황에 대한 영국 국민들(특히 잉글랜드 지역의..)의 위기감을 반영한 결과라는 사실에 비추어 딱히 배울 점이 없으므로 방문 일정에서 과감히 제낀 건지도.....;; 는 억측이고, 사실 영국과 미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공통분모가 많기 때문에, 현안이 되는 사회문제나 국제사회에서의 외교적 입장이 상당히 닮아 있다. 예를 들어, 낙수효과를 노린 과감한 감세정책은 양국이 오랫동안 추진해온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인데, 최근에는 심각한 빈부 양극화라는 부작용을 동일하게 겪고 있다.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얼마전 BBC 다큐멘터리에서 실제로 다룬 소재다.) 여하간 두 나라가 많이 닮아 있는 만큼, 어느 한 쪽은 상대편이 겪는 문제를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하고 반면교사로 삼을 법도 하건만, 아직까지는 서로 텔레파시가 잘 통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이클 무어의 이야기 전개가 논리적으로 100% 옳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옳지 않고 유럽은 옳다고 속단하는 것은 영화의 의도와도 맞지 않다. 마이클 무어가 훈훈하게 매듭을 짓듯, 유럽의 각국이 이상적인 사회를 가꾸기 위해 도입하기 시작한 사회적 안전망의 유래를 따라가보면, 사실 미국의 역사적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들이 많더라는 것이다. 미국도 진즉에 해낼 수 있었던 것을 다만 그 동안 다르게 방향 설정을 해왔을 뿐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독일 에피소드의 (독일이라면 늘 빠지지 않고 다뤄지는) 역사인식에 대한 부분이다. '과거 없이 미래가 없다'는 말은 흔하다 못해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이 되어버렸지만,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데 이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이는 반성 없는 일본 관료들에게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불과 50년 전에 우리 국토에서 끔찍한 전쟁이 벌어졌고, 그보다 50년 전에는 이웃나라로부터 유례없이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정말 묘한 기분이 든다. 과연 우리 자신은 우리의 역사로부터 오늘날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사실 마이클 무어의 작품은 처음이고, 또 모르긴 몰라도 논란이 많은 화제의 감독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어찌 됐든 역사인식을 확고히 해야겠다는 깨달음을 다시 한 번 얻으며 영화관을 나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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