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1950년대 알제리의 독립 전투에서 사망한 전사자의 유족을 찾아 위로의 말을 건넨다.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략한지 188년만에 이루어진 국가 수반의 화해 제스처였다. 에마뉘엘 마크롱이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 2017년의 일, 그러니까 극우의 아이콘 마린 르펜이 비록 대선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프랑스에서 점점 득세해가는 극우 민족주의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할 만큼의 존재감을 과시하던 때의 일이었다. 전쟁범죄와 학살을 인정하고 과거 식민국에 화해의 메시지를 건넨 에마뉘엘 마크롱의 행보를 두고, 프랑스 자국내에서 논란이 일었던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흔히 유태인 학살에 대한 독일 정부의 진정 어린 태도를 보면서, 왜 일본은 우리에게 같은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가에 대해 공분하지만, 사실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이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과거 식민국가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배상하는 경우가 더 이례적이다. 영국이 인도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사죄하지 않는 것이나, 이탈리아가 아프리카 식민국에게 사죄하지 않는 것이나, 사실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관계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기억 전쟁(des guerres mémorielles)에서 자존감을 되찾고 상대(일본)에게 이에 상응하는 태도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당시 식민지를 거느렸던 제국들이 어떤 관점에서 이 사안들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특별기고의 제목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또 한 가지 우리(한국)가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1965년의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인해 ‘차관을 받았으니 우리는 일본에게 일체의 청구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말(표현)’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기고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 협정에서 일본정부가 ‘식민통치의 불법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한일관계의 문제는 시작된다. 실제로 협정에 근거하여 일본정부에서 제공한 차관 역시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일본정부의 입장이다. 결국 외양으로는 한국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준 것처럼 보이지만, 모호한 뉘앙스와 함께 과거사를 봉합한 것이다. 문제는 전범에 대한 법적인 (또는 사회적인)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채(전범의 혼령이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포함한다), 갈등의 소지가 모두 가라앉은 것처럼 행동하는 일본정부의 움직임은 한국에서의 반일감정을 부추길 뿐 아니라, 일본에서의 혐한 분위기까지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할 만큼 했음에도 한국에서 너무 큰 목소리를 낸다는 의견이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나오는데,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조사에서도 낮게 나온다. (작년 기준 25.9%(EAI&NPO 조사) 참고로 작년 기준 일본인의 중국인에 대한 '비'호감도가 86%(퓨리서치센터 조사))
그렇다면 일본은 한국 사법부의 공식적인 판결과 장기간 이어진 수요집회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식민통치의 불법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이 역시 기고문에서 서술하듯 한일 강제합병이 일본천황의 동의하에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의 불법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천황의 과오를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들고 있는 천황의 판단과 행위에 흠집을 낸다는 것은 아무리 세속적인 정치인들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는 도무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어서, 무함마드를 신성모독했다는 이유로 테러를 자행하는 극단주의자들의 반동적인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 헷갈릴 때도 있다. 세계종교인 이슬람과 달리 신도는 일본에서만 발견되는 종교이기에 천황에 관한 이슈와 비판은 국제사회에서도 좀처럼 거론되지 않는 것일까. 일본 자국내에서도 천황제에 비판적인 지식인—예를 들면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들의 목소리는 숨막힐듯 보수적인 일본사회 분위기 속에 쉽게 파묻히는 듯하기도 하다. 그런 여러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과 함께 이 기고문을 스크랩해본다.
Lionel Babicz : « L’Algérie française et la Corée japonaise étaient bien plus que de simples colonies » (le 22 janvier 2021) 리오넬 바빅: “프랑스의 [속국이었던] 알제리와 일본의 [속국이었던] 한국은 단순한 식민지 이상이다.”
Dans son rapport sur les relations entre la France et l’Algérie, l’historien Benjamin Stora suggère d’étudier les liens entre Tokyo et Séoul. Lionel Babicz, spécialiste de l’Asie, analyse, dans une tribune au « Monde », les similitudes entre ces deux cas. 프랑스와 알제리의 관계에 관한 연구에서, 역사학자 벤자민 스토라는 일본과 한국의 연결고리에 관해 연구할 것을 제안한다. 아시아 전문가 리오넬 바빅은 세계 섹션의 특별기고에서 두 사례의 유사성에 대해 분석했다.
Le rapport Stora a choisi de faire « un détour par l’Asie ». S’appuyant sur la portée limitée des excuses japonaises à l’égard de la Chine et de la Corée, il écarte l’option d’actes de « repentance » similaires envers l’Algérie. Saluons d’abord le choix d’effectuer ce crochet asiatique. Le rapport mentionne également d’autres lieux où se déploient des luttes mémorielles – de l’Afrique du Sud au Chili – et une telle approche globale ne peut qu’être applaudie. 스토라의 연구는 ‘아시아를 굽어보기’를 택한다. 중국과 한국을 참작한(à l’égard de) 일본의 사죄가 지니는 제한적인 수준(la portée)에 기반하여, 그는 알제리에 대해서는 이와 유사한 ‘반성(repentance)’ 방침에 거리를 둔다.(écarter) 아시아에서 방향전환(crochet)을 행하기(effectuer)로 한 결정에 대해 일단 경의를 표해두자. 이 연구는 또한 기념비적인 투쟁(남아공과 칠레)이 전개됐던(se déployer) 또 다른 곳들을 함께 언급하는데, 이러한 포괄적인(global) 접근법은 호평할(applaudir) 수밖에 없다. [뒤에 훨씬 자세히 언급되지만, 요약하자면 일본에서 사죄에 대한 시도가 있었던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일본의 사죄 사례를 프랑스가 참고할 만큼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진다.]
M. Stora dresse un tableau généralement exact de la situation en Asie. Le Japon est effectivement « lui aussi touché par une série de conflits autour des questions mémorielles ». Le rapport évoque ainsi les contentieux sino-japonais et nippo-coréens, s’attardant notamment sur la question des « femmes de réconfort » (ces esclaves sexuelles au service de l’armée impériale japonaise), ou celle des visites de politiciens au sanctuaire Yasukuni (où sont vénérés des criminels de guerre). Le rapport ne va pas jusqu’à aborder la question de la similarité des expériences coloniales franco-algérienne et nippo-coréenne. Il y a pourtant là une clef permettant de mieux comprendre la pertinence de la question des excuses japonaises. 스토라씨는 아시아의 상황에 대해 대체적으로 정확한 밑그림을 그린다.(dresser un tableau) 일본 역시 실로(effectivement) ‘기억을 둘러싼 일련의 갈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연구에서 특히 ‘위안부(femmes de réconfort; 일제 군대를 상대한 성적 노예)’를 둘러싸고 지지부진한(s’attarder) 중-일・한-일 사이의 논쟁과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전범을 모신(vénérer) 곳) 방문 논쟁을 환기시킨다.(évoquer) 연구는 프랑스-알제리와 한-일간의 식민 경험의 유사성에 관한 문제까지 다루지는(aborder) 않는다. 그렇지만(pourtant) 일본이 했던 사죄의 적절성(la pertinence)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들어있다.
L’Algérie française (1830-1962) et la Corée japonaise (1910-1945) sont bien plus que de simples colonies. De la même manière que « l’Algérie, c’est la France » (François Mitterrand en 1954), la Corée, c’est le Japon ! L’Algérie était définie comme le prolongement de la France de l’autre côté de la Méditerranée, et la Corée comme l’extension du Japon par-delà le détroit de Tsushima. Dans les deux cas, les populations étaient étroitement imbriquées, avec des colons français en Algérie et des colons japonais en Corée, et la présence de populations d’origine coloniale en métropole. 프랑스 통치하의 알제리(1830~1962)와 일본 통치하의 한국(1910~1945)은 단순한 식민국 이상이다. 1954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알제리는 프랑스다’라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일본이었던 것이다. 알제리는 지중해 저편(l’autre côté)에서 프랑스의 연장(le prolongement)이었고(définir), 한국은 쓰시마 해협—이 지역의 정확한 공식명칭은 ‘대한해협(Straits of Korea)’이 맞다—반대편(par-delà)에 있던 일본의 확장된 형태(l’extension)였다. 이 두 사례에서, 알제리에서 프랑스 정착자들과 한국에서 일본인 정착자, 본국[즉, 각각 프랑스와 일본]에 있던 식민국 출신의 사람들은 밀접하게 뒤얽혀 있었다.(étaient étroitement imbriquées) [알제리 출신의 알베르 카뮈나 입생로랑에 비교해 볼 때, 한국 출신으로 활동한 일본 지식인은 개인적으로 떠오르지 않고 다소 과장된 평가라 생각된다. 거꾸로 말하면 식민지배 기간이 길었던 알제리에서 프랑스에 의한 동화가 더 깊이 철저하게 이루어졌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알제리 전투 역시 세계사적으로 가장 잔인했던 전투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Nuage de fumée> 연막(煙幕) 또는 '연기에 가려진 전운(戰雲)?!'
Les idées à la base de la colonisation sont aussi largement similaires. Comme la France en Algérie, le Japon se considère comme porteur d’une mission civilisatrice à l’égard de la Corée. Et les deux colonies sont destinées, à terme, à être assimilées au sein de la métropole. En Corée, cette volonté d’intégration se traduira, à partir du milieu des années 1930, par une tentative d’éradication systématique de la culture locale. Suppression de la langue coréenne, adoption forcée de noms japonais, obligation de vénérer l’empereur et de visiter des sanctuaires shintoïstes – des mesures qui laisseront des marques profondes au sein de la société coréenne. 식민화의 바탕이 된 생각도 크게 유사하다. 프랑스가 알제리에 그러했듯이, 일본은 자신들이 한국에 문명화 사명의 전달자(porteur)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à terme; 긴 안목에서) 이 두 식민지는 본국의 휘하에(au sein de) 동화되어 갈 수순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에서 통합에 대한 의지는 지역문화를 체계적으로 말살하려는 시도(la tentative)의 형태로 나타난다. 한국어 [사용의] 탄압, 일본어 이름으로의 강압적 개명, 천황 숭배와 신사 참배에 대한 강요는 한국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긴 조치들이다.
Le chapitre colonial se clôt de manière soudaine pour la Corée, dont la libération, en 1945, est le corollaire de la défaite japonaise. L’Algérie, pour sa part, gagne son indépendance en luttant de longues années contre la France (1954-1962). Mais dans les deux cas, le lien colonial est si étroit que la séparation provoque un traumatisme profond. C’est dans ce cadre que s’inscrit la question des excuses évoquée par Benjamin Stora. 한국에서 식민통치는 급작스럽게 마감되었는데(se clore), 1945년의 해방은 일본의 패전에 따른 결과(le corollaire)였다. 알제리는 그 나름대로 1954~1962년에 이르는 긴 기간 프랑스에 대항해 싸움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 하지만 두 사례에서, 식민지의 굴레(le lien)는 너무 끈질겨서 분리독립은 깊은 트라우마(traumatisme)를 남겼다. [일본의] 사죄에 관해 벤자민 스토라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le cadre)에서다.
Contrairement à certaines idées reçues, Tokyo a présenté à ses anciennes victimes asiatiques une longue série d’excuses, particulièrement depuis le début des années 1990. Avec la Corée du Sud, les premières excuses remontent même à 1965, lorsque le ministre des affaires étrangères exprima ses « sincères regrets » et « profonds remords » à l’égard d’une période « malheureuse » de l’histoire des deux pays. 몇몇 통념(les idées reçues)과 달리, 일본은 특히 1990년대 초반 이후로 아시아의 옛 피해자들에게 일련의 긴 사죄를 표명했다. 한국에서 첫 사죄는 심지어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remonter), 당시 외무상은 “양국 간 오랜 역사 중에 ‘불행한’ 시간이 있었음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로 ‘깊이 반성’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언급하는 ’65년의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는 ‘식민통치의 불법성’에 대한 부분이 명시되지 않아서 2021년인 아직까지도 한국정부와 일본정부간에 협정의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이는 기사의 후반부에 더 자세히 다뤄진다.]
Les excuses se feront progressivement plus explicites, plus directes. En 1998, pour la première fois, les deux pays font référence au passé dans un document écrit. Le Japon y reconnaît que la domination coloniale a causé « d’immenses dommages et souffrances » à son voisin, et exprime « ses regrets les plus profonds et ses sincères excuses ». Et en 2010, marquant le centenaire de l’annexion, le premier ministre Naoto Kan affirme que la Corée fut assujettie au contrôle japonais contre la volonté du peuple coréen. La domination japonaise a privé les Coréens de leur pays et de leur culture, et porté profondément atteinte à leur dignité. 사죄는 점점 더 명시적이고 더 직접적인 형태를 띠었다. 1998년, 양국은 최초로 문서화된 형태로 과거사에 대한 준거를 마련했다. 여기서(y) 일본은 식민통치가 이웃국가에 ‘심대한 피해(dommage)와 고통(souffrance)’를 야기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대단히 깊은 유감과 진정한 사죄’를 표명했다. 그리고 2010년, 병합(l’annexion) 100주년(le centenaire)을 맞이하여 칸 나오토(菅 直人) 수상은 한국은 한국인들의 의지에 반하여 일본의 통치에 예속되었음(être assujettie)을 확인하였다. 일본의 통치는 한국인들로부터 그들의 국가와 그들의 문화를 박탈하였으며, 그들의 존엄성을 심히 훼손했다.
Apparemment, on peut difficilement faire mieux. Pourquoi les Coréens (et d’autres pays asiatiques) considèrent-ils alors les paroles de contrition japonaises comme un nuage de fumée ? Le sentiment général est en effet que le Japon, malgré cette avalanche verbale, refuserait, en réalité, de toucher à l’essentiel. 언뜻 보았을 때, 이보다 더 [사죄가] 나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왜 한국인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이 참회하는(contrition) 말들이 연막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실상(en effet) 일반적인 정서는, 일본이 여러 말들을 쏟아내고(avalanche) 있음에도 실제로는 본질을 건드리기를 회피한다는 것이다.
Dans le cas de la Corée, il s’agit de l’empereur. Le Japon a toujours refusé de remettre en cause la légalité de l’annexion de 1910, effectuée au nom de l’empereur Meiji. Certes, les empereurs japonais se sont excusés à maintes reprises pour les souffrances infligées à la Corée et à son peuple, mais ils n’ont jamais fait la moindre allusion au traité d’annexion lui-même qui, selon les thèses officielles japonaises, a été conclu légalement. En outre, aucun empereur ne s’est jamais rendu en visite officielle en Corée du Sud (contrairement à un voyage en Chine effectué en 1992 par Akihito). Un déplacement impérial dans la péninsule coréenne impliquerait, en effet, des excuses d’une autre dimension, ayant trait à la légalité même de l’annexion et au rôle tenu par leur ancêtre Meiji. 한국의 경우, 문제는 천황과 관련되어 있다. 일본정부는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발효된 1910년 [강제]병합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remettre en cause)을 늘 거부해 왔다. 물론(certes) 일본천황은 거듭(à maintes reprises) 한국과 그 국민에게 가해진(infliger) 고통에 대해 사죄를 해왔지만, 병합조약 자체가 일본의 공문서에 따라 법적으로 정리된 것이라는 일말의 암시(la moindre allusion)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en outre) 어떤 일본 천황도 한국을 공식적으로 방문한 적이 없다. (아키히토 천황에 의해 1992년 중국 방문이 있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한반도로 강제이주(déplacement)를 시켰던 것은 사실 다른 측면에서의 사죄를 함축할 텐데(impliquer), 이는 바로 병합의 정당성과 선대의 메이지 천황과 관련이 있다.(avoir trait à)
<Des plaies toujours à vif> 여전히 생생한 상처(plaie)
Sur un plan plus général, deux autres sujets atténuent la portée des excuses japonaises. D’abord, les visites répétées de certains premiers ministres et autres politiciens au sanctuaire Yasukuni, qui semblent témoigner d’un fossé entre paroles et actions. Ensuite, l’absence d’une résolution parlementaire explicite et quasi unanime sur la guerre et le colonialisme, un texte qui serait adopté par les représentants de la nation dans son ensemble. En 1995, pour le cinquantième anniversaire de la fin de la guerre, le premier ministre (socialiste) Tomiichi Murayama, conscient de cette omission, était pourtant parvenu à faire passer à la Diète une résolution exprimant les « profonds regrets » du Japon pour « les douleurs et souffrances infligées aux peuples d’autres pays, particulièrement en Asie ». Mais le texte n’avait été voté qu’à une courte majorité, après avoir été amendé et avoir vu sa portée atténuée. 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두 개의 다른 과제들이 일본이 해온 사죄의 수준을 약화시키고 있다. 우선 몇몇 수상과 정치인의 반복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말과 행동의 골(le fossé; 간극)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식민지 및 전쟁에 대해 명시적이고 단일하다고 할 만한(quasi unanime) 정부 차원의 해법, 즉 온전히(dans son ensemble) 국가 수반이 채택한 문헌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1995년, 종전 5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 토미이치 수상(사회당)은 이러한 결함(l’omission)을 인지하고 국회에(à la Diète) ‘다른 국가, 특히 아시아 국민들에게 야기된 아픔과 괴로움’에 대해 일본정부의 ‘깊은 유감’을 나타내는 결의(la résolution)를 나타내기에 이른다.(parvenir à) 그러나 이 의안(le texte)은 수정되고 [사죄표현의] 수준이 완화된 뒤, 과반을 얻지 못하는 데(à une coutre majorité) 그쳤다.
La question des excuses japonaises est complexe et épineuse. Elle est souvent instrumentalisée à des fins politiques, mais elle est aussi l’expression de plaies toujours à vif. Et il n’est pas certain qu’elle puisse être contournée. Qu’en est-il de la France et de l’Algérie ? Les lacunes japonaises peuvent suggérer quelques pistes de réflexion supplémentaires. Une résolution parlementaire solennelle présentant les excuses de la nation, accompagnée d’un geste fort de la part du chef de l’Etat (qui serait plus qu’un simple discours) pourrait, peut-être, contribuer aussi à un apaisement des guerres mémorielles. 일본의 사죄에 관한 문제는 복잡하고 까다롭다.(épineux) 이 문제(elle)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곧잘 도구화되지만, 이는 또한 상처가 여전히 생생하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문제가 되돌아갈(contourner) 수 있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 문제(en)는 프랑스와 알제리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일본이 보였던 미흡함(la lacune)들은 보완적으로 되새길 만한 궤적(la piste)을 제시할 수 있다. 국가 수반으로부터(de la part de) 강력한 제스처가 동반된 국가의 사죄를 표하는 정부 차원의 엄중한 해법이 아마도 기억 전쟁(des guerres mémorielles)을 누그러뜨리는(apaisement)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