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셋째 날. 다산초당(茶山草堂)여행/2023 늦여름 목포 2023. 9. 3. 11:17
짧은 목포 일정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한 끝에 가기로 마음먹은 곳은 강진군의 다산초당이다. 목포는 목포를 기점 삼아 주변 지역을 둘러보기 좋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이 일대가 넓어서 이동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다산초당을 가는 데에는 차로 1시간 여가 걸렸는데, 목포에 머무른 3일 중 날씨가 가장 좋아서 부족한 시간만 아니었다면 한적한 길가 아무곳에나 차를 세워두고 산과 들판, 바다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대기의 열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산등성이의 몇 곱절은 되어 보이는 뭉게구름들이 기세 좋게 튀어오르고 있었다. 다산초당은 영덕의 월송정만큼이나 한적하고 고즈넉해서 마음이 느긋해지는 공간이었다. 정약용은 유배생활 11년간 이곳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집필했다. 지금도..
-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일상/book 2023. 8. 31. 18:20
이 책은 반드시 죽음으로 이야기가 귀결되는 18개의 짤막한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 소설 속 죽음은 그 자체로 비참하고 극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서사가 유려하거나 한 것은 아닌데, 등장인물들이 개성이 강하고 미시오네스 지방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서 상당히 몰입감을 느끼며 읽었다. 번역가의 열정이 느껴지기도 했던 책. 그는 깨달았다. 계속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과거의 흔적을 마지막까지 없애버리는 일은 피할 수도 없고 미룰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p.155 죽음.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은 몇 년에 걸쳐, 혹은 몇 달, 몇 주, 며칠에 걸친 준비 끝에 어느 날엔가 우리 차례가 와 죽음의 문턱 앞에 서게 되는 것을 수없이 생각하곤 한다. 그것은 숙명적인 법칙이며 받아들..
-
둘째 날. 대흥사(大興寺)여행/2023 늦여름 목포 2023. 8. 30. 18:12
두륜산 자락에 자리잡은 대흥사는 땅끝마을로부터 다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거리에 있다. 나는 땅끝마을을 오면서 이용했던 도로를 다시 이용하는 것이 싫어 이번에는 강진 방면으로 길을 타고 두륜산으로 향했다. 오전에 만난 카페의 주인 아저씨가 도솔암의 경치가 참 볼 만하다고 추천해주셨었는데, 짧은 일정상 도솔암을 들를 엄두는 내지 못했다. 더위가 점점 수그러드는 시간대가 되어 대흥사 입구에 도착했고, 일주문부터 길을 나서는데 계곡에 삼삼오오 모여 찬물에 발을 담그거나 가재를 잡는 사람들의 풍경이 어딘가 이국적이기도 하고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야영이 불가능한 지역이기 때문에 오로지 피서만을 목적으로 이곳 장춘계곡까지 들어온 사람들. 바다가 코앞인 지역인데도 그늘진 계곡에서 더위를 나는 모습이 어쩌면 더 합당해..
-
둘째 날. 송호해수욕장과 땅끝마을여행/2023 늦여름 목포 2023. 8. 29. 01:35
원래 목포로 내려올 때는 목포 여행을 겸해 신안 일대를 쭉 드라이브해보자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신안 일대의 명소를 검색해보니 갈 만한 지점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 실제 구경갈 만한 곳들은 정말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곳, 예를 들어 가거도나 홍도 같은 곳이었는데, 이번처럼 짧은 일정에 배를 탄다는 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목포를 기반으로 둘러볼 만한 주변 지역이 꽤 있어서, 해남과 진도, 강진 중에 어딜 갈 만한 곳을 고민하다가 최종적으로 해남이 낙점되었다. 해남을 여행한다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땅끝마을일 것이다. 나는 땅끝마을에 가기에 앞서 송호해수욕장의 한 카페에서 목을 축이기로 했다. 숭늉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단 카페였는데, 주차가 되지 않는 카페 앞 지점까지 걸어들어가..
-
첫째 날. 유달산(儒達山)여행/2023 늦여름 목포 2023. 8. 28. 11:05
해가 땅에 가까워지며 건물의 각진 음영들이 점점 짙게 두드러질 무렵, 나는 유달초등학교 옆길을 통해 유달산을 올랐다. 이전에 목포에 왔을 때는 케이블카로 유달산에 올랐기 때문에 등산을 하면 어떨지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무더운 날씨까지 더해져서 등줄기가 땀범벅이 되었다. 나는 서해랑길을 따라서 얼기설기 들어선 골목길을 타고 오르다가 도중에 등산로로 길을 틀었다. 그리고 유달산 스테이션과 마당바위를 차례차례 지나 마침내 일등바위에 올랐다. 분명 일전에 케이블카를 타고 한번 왔던 장소인데도, 기시감 대신 전혀 새로운 풍경을 보는 느낌이 들어 잠시 정신을 가다듬게 된다. 나는 바로 이곳 유달산 정상에서 해가 질 무렵까지 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며 석양을 구경했다. 남쪽을 바라보면 영암 일대의 조선소가 보이고, 서..
-
-
다섯 번째 이사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3. 8. 26. 10:38
최근에 이사를 했다. 늘 그렇듯이 짐이랄 게 정해져 있고 많지도 않다. 그 중에 늘 껴 있는 건 찰스 에베츠의 커다란 흑백사진 벽보도 있다. 어쨌든 짐은 단출한데, 또 언제나 그렇듯이 이사 후에 짐이 정리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들을 새로이 사들여야 할 텐데, 넓지도 않은 집에 더 많은 물건을 들이기가 꺼려지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고민하다가 책장으로 쓸만한 선반을 하나 중고거래로 사들였다. 새까만 2단 철제 선반이다. 가운데 선반이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서 좁은 방에서도 시야를 가리지 않는 시원한 디자인이다. 나는 장대비가 오락가락 하는 어느 저녁에 이 녀석을 사들고 30분 거리를 낑낑대며 걸어왔다. 거래한 장소에서 손에 들고 갈 수 있을 만큼 물건을 곧바로 분해한 뒤 준비해..
-
목포행 열차여행/2023 늦여름 목포 2023. 8. 24. 18:09
목포는 올해 봄 출장으로 들르면서 한번쯤 여행으로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도시다. 그렇게 해서 하루는 한달 전 쯤인가 무턱대고 숙소를 예약해두었다. 숙소 위치는 목포의 구시가지. 여행 당일이 되고 나름 여름휴가 기간이 끝나가는 시점이라 사람이 많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서울역을 출발한 열차는 광주송정 역을 지나면서부터 퍽 한산해졌다. 마침내 목포역에 내렸을 때, 나를 맞이한 건 바닷바람 한 점 없는 찜통 더위였다. 마치 빛에 타들어간 필름처럼 태양이 쏟아지는 인도가 새하얗게 바랬다. 나는 옷가지와 카메라 따위로 빵빵해진 카키색 가방을 메고 15분여를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한동안 에어컨 바람을 쐬다가 단출한 차림으로 숙소를 나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나머지..
-
무고한 존재일상/book 2023. 8. 22. 13:08
내가 나의 회한을 가라앉히는 데 사용했던 이 공식은 내 정신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플라톤을 칭송하던 나의 가장 훌륭한 사상으로부터 이상적인 유령을 만들어냈다. 나는 자유분방하고 삐뚤어지고 연약하면서도 내 존재의 영역 안에서 엄격하고 강직한 영혼, 부패할 수 없는 영혼을 발견하고 흡족해했다. 나는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 영원히 사랑받을 존재라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나의 모든 악습과 나의 모든 비참함과 모든 약점이 바로 이 환영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나는 모든 똑똑한 남자들의 꿈이 나를 위해서라도 현실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배신을 모르는 여자를 지속적으로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p.65 나는 그를 상상할 때마다 항상 그의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한 주인공을 떠올렸다. 그는 늘..
-
라이 이야기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3. 8. 10. 08:53
하루는 자주 찾는 카페에 갔다가 만석이어서 별 수 없이 바로 옆 공원 정자에 잠시 앉았다. 비가 걷힌 뒤 푹푹 찌는 듯한 날씨였다. 그늘 아래 몸을 숨기고 넋놓고 앉아 있는데, 정자 위 마루에서 페트병으로 장난치는 아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더위에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던지 내가 오기 전부터 있던 아이인지 내가 오고 나서 나타난 아이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옆에는 웬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내게 다가와 연신 살갑게 부대낀다. 아마 나한테서 강아지 냄새가 나서일 수도 있고 천성이 사람을 좋아하는 강아지일 수도 있다. 그 품이 예뻐서 나도 놀아주게 된다. 사내 아이는 물이 반쯤 담긴 페트병을 던지며 노는 데 여념이 없다. 내가 강아지 나이를 물으니 그제서야 8개월이라고 짧게 답한다. 이름은 라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