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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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향기—샤넬 No.5와 레드 모스크바일상/book 2024. 1. 1. 19:11
후각을 통해 역사의 격변기를 들어다본다는 건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보고 싶지 않은 것으로 시선을 돌릴 수는 있지만, 알고 싶지 않은 냄새를 피하기 위해 숨을 쉬지 않을 수는 없다. 때문에 때로 후각은 시각보다도 많은 것을 전달한다. 역사와 사회에 관한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말하듯이 후각은 "비본질적으로 인식되어 합리성의 세계에서 추방되었(p.45)"고, 사회과학적 텍스트에서 냄새는 깔끔히 표백되었다. 이 책은 그렇게 도외시되었던 후각에 기반하여 크게 두 축의 이야기를 대칭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세계사를 새로운 렌즈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한 축에는 자유주의의 세계가, 다른 한 축에는 공산주의의 세계가 있다. 한 축에는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라는 조향사가, 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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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소돔과 고모라 II일상/book 2021. 7. 22. 17:19
마르셀 프루스트의 글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 만연체가 많다. 이 부분은 다시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되는데, 우선 프랑스어의 운율을 모른 채 번역본을 읽을 때는 만연체가 함축한 리듬을 파악하기 어렵다. 각주에 프랑스어로 어떤 언어유희가 활용되고 있는지 상세하게 다루고 있지만, 아무래도 유머를 따라가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데다 만연체로 상황이나 감정에 대한 묘사가 밀도있게 이뤄지지만, 거꾸로 얘기하면 한 권을 다 읽어도 며칠에 걸친 스토리이거나 기껏해야 한 계절에 걸친 스토리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달리 말하면 프루스트는 '시간'을 귀중한 물건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내듯 아주 치밀하게 써내려간다. 한참 몰입해서 읽고 있는데 문득 아직 한 장면이 끝나지도 않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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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소돔과 고모라 I일상/book 2021. 5. 23. 23:21
부제에서 암시하는 그대로 샤를뤼스 남작과 '나'의 연인 알베르틴의 일탈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나'는 알베르틴을 처음 만났던 발베크로 다시금 발걸음을 옮긴다. 가능하다면 마르셀 푸르스트가 소설의 배경으로 썼던 브르타뉴, 노르망디 지방과 파리 시내의 지도를 구해서, 언젠가 프랑스를 제대로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천천히 둘러보고 싶다+_+ 게르망트 댁에서의 저녁 파티 초대를 확신할 수 없었던 나는 파티 참석을 서두르지 않고 밖에서 한가로이 서성거렸다. 여름의 태양도 나와 마찬가지로 움직임을 서두르지 않는 듯 보였다. 밤 9시가 지났는데도 콩코르드 광장의 룩소르 오벨리스크에는 해가 분홍빛 누가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다 해가 그 빛깔을 수정하여 금속 물질로 바꾸자 오벨리스크는 더없이 소중한 모습을 띠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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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일상/book 2020. 9. 7. 23:33
두 권의 책 사이에서 손끝이 허공을 맴돌았다. 『절망』과 『창백한 불꽃』. 모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책이다. 『롤리타』를 읽은 뒤로 사놓은 책들인데, 처음에는 『절망』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가 결국 『창백한 불꽃』을 집어들었다. 『절망』은 정말 절망스러울 때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그런 절망은 찾아오지 않았다. 또는 그런 절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창백한 불꽃』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독서를 요구했던 책이다. 머리말에서부터 킨보트라는 인물이 편집과 출판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갸우뚱하기도 했고, 나보코프의 장난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은 크게 두 개의 구성으로 나뉜다. 하나는 킨보트의 절친한 벗인 셰이드가 쓴 총 네 편 1000행 짜리 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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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할 책일상/book 2020. 7. 1. 00:07
처음에는 문학비평서인 줄도 모르고 그저 소설로 알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소설이라 여기고 이라는 제목을 접하면 굉장히 구미가 당긴다. 책은 뱃사람들을 영도(零度; zero degré)로 이끌어가는 세이렌의 이야기와 함께 포문을 연다. 제임스 조이스가 에서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의 그리스 신화를 차용했던 것이 떠오른 이 대목에서 모리스 블량쇼의 글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뒤이어 프루스트의 글에 나타난 시간 관념을 해제(解題)하는 과정에서부터는 건조하고 딱딱한 문학비평 이야기로 넘어간다. 문학비평이라기보다 철학에 가까운 그의 글―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음양(陰陽)의 무한궤도를 연상시키는 그의 사상은 동양적이고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풍긴다―이 실제 영양가가 있든 없든간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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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수선(修繕)해 드립니다일상/film 2020. 6. 28. 00:11
기억이 더 가물가물해지기 전에 리뷰를 남겨야 할 것 같다.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맨 처음 떠올랐던 것은 라는 프랑스 영화다. 프랑스 사람들은 시간(le temps)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단지 과거-현재-미래를 이동한다는 의미를 떠나 시간의 흐름을 재해석하는 데에 천부적인 기질이 있는 것 같다―두 영화의 공통점 모두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점들을 엮는다는 점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두 영화가 차이나는 지점 또한 바로 그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나는데, 는 실제로 불연속적인 시간의 변환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반면, 는 아주 철저하게 현재에 천착하고 있다. 에 그려지는 빅토르의 화양연화(花樣年華; la belle époque)는 어디까지나 '연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연출된 가상의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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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게르망트쪽 II일상/book 2018. 9. 22. 21:16
병과 죽음의 심연이 우리 몸속에 열릴 때면, 또 세상과 우리 자신의 육체가 우리에게 덮치는 혼란스러운 동요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때면, 그때 근육의 무게를 유지하고 골수까지 파고드는 전율을 견디면서 평소에는 그저 사물의 소극적인 자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던 그런 부동 자세를 취하는 일이나, 머리를 똑바로 세우고 안정된 눈길을 유지하는 일조차도 모두 생명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극심한 투쟁이 된다. p.13 깨어남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큰 변화는 우리를 명료한 의식의 삶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지성이 쉬던 곳, 마치 유백색 바다 밑과도 같은 곳에 새어든 빛에 대한 온갖 기억을 잊게 하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표류하던 곳에서 반쯤 가려진 상념은 깨어 있음이라는 이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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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게르망트 쪽 I일상/book 2018. 8. 23. 00:05
그때 게르망트라는 이름은 산소나 다른 기체를 담은 작은 풍선과도 같아, 내가 만약 그 풍선을 터트려 안에 담겨 있는 걸 나오게만 한다면, 나는 그해의 콩브레 향기를, 바람에 살랑거리는 산사나무 꽃향기가 섞인 그날의 콩브레 향기를, 광장 한 모퉁이에서 비를 알리는 전조인 바람이 차례로 햇살을 날아가게 하고 성당 제의실 붉은 모직 양탄자를 펼쳐 놓고 거의 제라늄 분홍빛에 가까운 반짝이는 살색으로, 말하자면 환희 속에 그토록 축제에 고귀한 빛을 띠게 하는 바그너풍 부드러움으로 덧칠하던 향기를 호흡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날에는 죽은 철자 가운데서 갑자기 실체가 꿈틀거리며 그 형태와 새겨진 모양이 느껴지는 아주 드문 순간을 제외하고는, 일상생활의 현기증 나는 소용돌이 속에서 실질적인 용도로밖에 쓰이지 않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