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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4. Панҷакент |루다키 거리(хиёбони Рӯдакӣ)여행/2025 우즈베키스탄 2025. 6. 24. 13:47
* 처음부터 승산이라곤 없는 흥정이었다. 800 소모니, 한화로 10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 국경을 넘어간 곳에서 벌떼처럼 내게 접근한 택시기사들이 제시한 금액이다. 타지키스탄 측 경비소를 지나 바리케이드까지 넘었을 때, 타지크인들 일고여덟 명이 내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몇은 혼자서 영업을 하는 듯했고, 또 몇몇은 둘 쯤 짝을 이뤄서 호객 행위를 하는 듯 했다. 상당히 험상궂은 인상의 기사들에게 에워싸이고도 별다른 위험을 느끼지 못한 것은, 나의 대담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엎어진 물을 되담을 수 없다는 현실 감각에서였다. 수중에 700 소모니를 들고 있던 나는, 아니 정확하게는 700 소모니를 들고 있는 줄로 알고 있던 나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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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화에 대하여(On Weathering)일상/book 2025. 6. 23. 09:58
부재의 수가 증가하면 부재의 연결지점도 많아지고 통합적인 구조보다는 병렬적인 접합부가 늘어난다. …접합부가 늘어나자 자연의 영향을 직접 받는 건물 부위도 많아졌다. ―p.22 …더 많은 선택 가능성을 보장해야 할 대량생산 시스템이 실제로는 틀에 박힌 선택으로 이끌었다… ―p. …창조 행위란 건축가와 시공자가 자연의 힘을 예측하면서 작업하는 가운데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건물 표면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는 건물 외관에 영구적으로 새겨지는 음영을 만든다. 빛과 어둠의 대비는 또한 뚜렷한 것과 모호한 것의 대립이며 실제와 가상 사이의 긴장이다. ―p.65 역설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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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4. Samarqand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여행/2025 우즈베키스탄 2025. 6. 22. 05:52
* 마침 길 건너에 공회전 중인 택시가 있었다. 20만 숨, 한화 2만 원. 영어라곤 단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이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휴대폰으로 숫자를 두드려 흥정한다. 운전 내내 질펀하게 수다를 떨던 아저씨는 이따금 내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어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게 왜 여행을 혼자 왔냐고 묻는 말은 어떻게 해서 알아들었는지 아직도 모를 일. 사마르칸트 시내를 빠져나오면서 점차 전원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여전이 우즈베크 양식 특유의 커다란 가옥과,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는 염소며 양떼들, 등굣길에 나선 아이들의 모습이 차창밖으로 스쳐 간다. 에어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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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일상/book 2025. 6. 20. 09:38
인간은 몸을 갖고 있고, 자신의 취약성을 인식하며, 매개된 경험과 매개되지 않은 경험 사이를 자주 오가고, 성찰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하며, 결국 유한하다. 반면 사용자 경험은 실체가 없는 디지털이고, 추적 가능하며,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고, 항상 매개자가 있다.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고 무한을 약속한다. ―p.16 경험에는 역사가 있고 그것은 우리 육체에 흔적을 남긴다. 소뿔에 들이받힌 투우사의 상처는 일종의 지식을 나타낸다. 출산 이후 생긴 튼 살은 인간의 몸이 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들을 상기시킨다. 또한 ‘눈 밖에 났다’, ‘앓던 이가 빠졌다’, ‘손을 씻었다’, ‘입이 무겁다’와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육체는 은유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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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II. 두 명의 알리여행/2025 우즈베키스탄 2025. 6. 19. 15:56
* 알리의 게스트하우스. 내가 묵은 이 숙소는 이름 그대로 알리라는 집주인이 운영하는 곳이다. 간밤 레기스탄에 도착한 시간이 이미 저녁 여덟 시를 훌쩍 넘겼고, 레기스탄의 야간 조명쇼를 구경하느라 체크인 시간은 그보다도 더 늦어졌다. 알리의 집으로 가는 물라칸도르프 골목에서는 꼬마 아이 몇몇이 야밤의 공놀이를 신나게 즐기고 있었다. 노란 널빤지에 라틴 알파벳이 적힌 알리의 숙소명은 숨겨진 위치에도 불구하고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대문 문지방을 넘으면 바로 왼쪽으로 숙소 주인의 생활공간인 2층 주택이 있고, 허리 높이만큼 단차가 있는 널찍한 공간을 마당처럼 활용하는 듯 화분에 담긴 식물을 여럿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4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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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망 붕괴의 시대일상/book 2025. 6. 18. 18:35
심각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이것만은 확실했다. 공급망은 상품을 순환시키는 체계일 뿐 아니라 인간이 환경을 통제한다는, 내면 깊숙이 뿌리내린 의식의 원천이자 현대인의 삶을 하나로 묶는 흔치 않은 시스템이었다. 정부 불신, 언론에 대한 회의, 기업의 동기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찬 시대지만, 적어도 택배기사를 집 앞으로 오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은 믿을 수 있었다. 농장, 공장, 물류센터를 가정과 기업으로 이어주는 연결 고리는 끊기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p.21 우리는 아마존을, 치명적인 팬데믹 기간에 물류창고 직원들에게 마스크는 공급하지 못했지만 우주로 날아갈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억만장자 제프 베이조스가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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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3. Samarqand |물라칸도프 길(Mullakandov ko'chasi)여행/2025 우즈베키스탄 2025. 6. 17. 15:52
* 사마르칸트 역에서 나는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택시를 잡았다. 사마르칸트에는 두 개의 노면 전차(streetcar) 노선이 있다. 마침 역 앞에 전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는데 승객이 꽤 찬 걸로 보아 곧 출차를 앞둔 것 같았다. 전차에 오르기 전 확인을 받아두고자 기사 아저씨에게 “레기스탄?”하고 물으니 영 반응이 시원찮다. 전차 뒤쪽 자리에 앉아 나를 지켜보던 할머니가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손주의 등을 민다. 소년은 전차의 전차의 뒷문으로 몸을 빼고 다른 노선을 타라고 유창한 영어로 일러 주었다. 그럼에도 다른 노선의 전차는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 내 숙소가 있는 곳은 레기스탄에 인접한 물라칸도르프 길. 내가 레기스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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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2. 금선사(金僊寺)주제 없는 글/印 2025. 6. 16. 12:38
오래도 묵혀 두었던 늦봄의 흑백사진. 원래 작년 11월경부터 가보려 하던 이곳을, 즉흥적으로 약속을 잡아 늦봄에 찾은 건 더 잘된 일이었다. 여의도 벚꽃 축제도 끝난 지 꽤 된 시점에 벚꽃이 남아 있을까 싶었지만,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은 이 고즈넉한 사찰은 이제 막 봄이 시작된 것 같았다. 벚꽃보다도 먼저 지는 목련도 채 잎을 떨구지 않은 채였으니 말이다. 나는 흐드러지게 늘어진 이날의 벚꽃만큼이나 곧 떨어질 듯 꽃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새하얀 목련잎과 그 순백을 뚫고 나올 것처럼 투명하게 비추던 한낮의 햇살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한겨울 프랑스인 친구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찾아 이 동네를 잠깐 찾은 적이 있지만, 이북오도청이라는 다분히 수상하고도 삼엄한 이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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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헤다 가블러주제 있는 글/Théâtre。 2025. 6. 15. 11:15
금요일 밤부터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잠만 잤다. 저녁을 먹기 위해 잠깐 앉아 있던 걸 빼면 계속 누워만 있었던 셈이다. 사람의 몸은 신기해서, 이렇게 잠이 쏟아진 건 몸이 회복을 필요로 한다는 신호였을 텐데, 그만큼 회복의 시간을 보낸 지금 머리는 오히려 더 무겁고 지끈거리기만 한다. 모든 것은 균형 잡힌 것이 가장 좋다. 지난 주 금요일, 지지난 주 금요일 서로 다른 두 편을 보았다. 종종 티비에서 뉴스 말미에 나오는 문화 뉴스를 보는 편인데—챙겨본다기보다는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뉴스를 쭉 따라간다—라는 연극이 한창 상연중이라는 소식을 흘러나왔다. 헨리크 입센의 작품이라면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이 전부고, 그마저도 기억이 바래 이 작가 또는 작품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