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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산책여행/2025 끝추위 묵호 2025. 5. 18. 09:33
이제 이 여행기를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이 여행기의 끝은 아주 평범하고 아주 밋밋하다. 장소로는 요새 전국 각지에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는 스카이워크가 목적지였고, 날씨로는 맑다고 할 순 없는 우중충한 날이었으며, 시간으로는 주말 점심에 해당하고 사람들이 한창 활동하기 시작할 때였다. 이른 아침 무릉계곡을 다녀온 뒤 느즈막히 도착한 논골담길에는, 붐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 아담한 마을이 품기에는 다소 북적인다고 느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두 개의 스카이워크—바다에 접한 낮은 높이의 스카이워크가 있고 산자락 위에 설치한 고층 스카이워크가 있다—를 지나 묵호등대, 논골담길을 따라 거니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일찍이 문제되고 있는 오버투어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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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Toshkent |베쉬 코존(Besh Qozon)여행/2025 우즈베키스탄 2025. 5. 17. 22:28
* 우즈베키스탄에서 처음 맛보는 필라프는 제법 맛있었다. 음식 주문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필라프를 기본으로 시키고, 삼사(somsa)라 불리는 전통 빵과 샐러드를 주문했다. 여기에 콜라까지.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아 많은 양을 주문했다고는 생각을 못했는데, 식사가 나오고 보니 삼사는 냄비만한 크기에 통으로 나왔고 콜라는 뜬금없이 1.5L 들이를 가져다 놓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탄산음료를 즐기는 테이블이 여럿 보인다. 그래도 내가 찾은 베쉬 코존(Besh Qozon)은 N과 M의 말대로 우즈베크 스타일의 필라프로 이름난 곳인지, 넓은 식당 건물과 테라스로 사람들이 거의 다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점심시간에서 빗겨난 3시경에 찾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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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1. 서계동(西界洞)주제 없는 글/印 2025. 5. 16. 15:27
사진 현상소에서 켄트미어 400이라는 흑백필름을 추천받았다. 흑백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는 좀 되었지만, 막상 흑백 필름을 사기는 망설여졌다. 어디선가 흑백사진이 더 찍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똑같은 사물을 찍어도 색이 휘발된다는 게 어쩐지 손해보는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다. 흑백필름을 구입하던 당시는 마침 벚꽃철이었기 때문에 이 계절의 화사함을 무채색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있었다. 그간 주로 써왔던 포트라 400이 아닌 다른 필름을 쓰는 건 워낙 오랜만의 일이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좀 더 공을 들이고 아껴가며 쓰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36칸의 필름 안에 도시 속 달동네, 봄이 찾아온 사찰, 우리집 강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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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Toshkent |희생자 기념 공원여행/2025 우즈베키스탄 2025. 5. 15. 13:41
* M과 N이 타슈켄트에서 추천한 장소는 베쉬 코존(Besh Qozon)이라는 곳이었다. 우즈베크어를 알 리 없는 나는 타슈켄트의 어떤 지역명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게 된 바 이곳은 유명 레스토랑의 이름이고 이 일대에 둘러볼 만한 곳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M은 내게 산책하기 좋은 공원이 일대에 있다고 했고, 나는 공항에서 내린 후 택시기사에게 베쉬 코존으로 목적지를 불렀다. 목적지가 가까워지면서 오른편으로 말로 들었던 쾌적한 공원이 나타나자 목적지까지 가지 말고 그곳에서 하차하겠다고 했다. ** 한국에서 챙겨온 유심은 어찌된 일인지 잘 작동하지 않았다. 신호를 읽기는 읽었지만 수신감도가 낮아 인터넷이 여간 느린 게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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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I. 두 우즈베크 사람여행/2025 우즈베키스탄 2025. 5. 14. 11:33
*여행마저 일처럼 느껴졌다. 여권, 현금, 유심 이 세 가지만큼은 잊지 말자 다짐, 얼추 배낭을 싸고 마침내 출국일이 밝았다. 아침부터 고장난 보일러를 고치느라 30분이 훌쩍 지났고, 이쯤 되면 여행을 가지 말라는 일종의 암시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비행기값이야 어떻게 되든 될대로 되라지 생각하며 화를 삭인다. **여행일정을 한번 바꾼 탓에 내 자리는 창가석도 복도석도 아닌 중간석으로 임의배정되었다. 발권된 티켓에서 중간석을 의미하는 B라는 알파벳을 보며 속으로 탄식이 나왔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6월초 티켓을 예약한 나는, 뒤늦게 비행기값이 이상하리만치 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확인해보니 5월에 예약한다는 게 같은 날짜로 6월에 예약을 해놓았다. 어쩔 수 없이 일정을 바꾸는 데 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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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세상여행/2025 우즈베키스탄 2025. 5. 10. 13:29
나는 우즈베키스탄에 대해서 무얼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생각했던 건 사마르칸트라는 낱말 그 하나였다. 우즈베키스탄은 보이지 않는 세상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은 그러니까 ‘미디어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이었다. 중국이나 인도처럼 경제적인 중요성이 강조될 필요도, G7처럼 강대국의 역할과 위상이 강조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세상. 그곳에서 내가 찾았던 건 한때 찬란한 번성을 누린 사마르칸트라는 신기루나 다름없는 도시의 이름, 그 허울뿐이었다. 나는 그곳이 라틴 알파벳보다 키릴 문자에 익숙한 세상이라는 것을, 유목민적 생활패턴보다도 이슬람적 생활패턴이 확고한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당연히 있을 거라 여길 만한 글로벌 프랜차이즈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위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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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Conclave)일상/film 2025. 4. 27. 11:49
오디션 프로그램의 추기경 버전(?)이 있다기에 친구와 함께 보러 간 영화 . 보러가기로 하고 벌써 몇 주째 두 번을 미룬 영화였다. 출연정보에 레이프 파인즈가 있어 실망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종교라는 주제가 워낙 협소해서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초반부에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깜박 졸기는 했지만, 그 잠깐을 놓쳤어도 전체적으로 재밌게 봤다. 특히 같이 간 친구가 정말 재밌게 본 듯했다. 4월 중순으로 넘어가는 초순 하루 안에 사계절이 다 들어가 있던 이날은, 영화관을 나와 따뜻한 옹심이를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 했다. 개인적으로 콘클라베 개최를 선언하는 로렌스 추기경이 ‘확신의 위험성’에 대해 웅변하는 장면도 좋았지만, 마지막 로렌스 추기경과 베니테스 추기경 둘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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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시간여행/2025 끝추위 묵호 2025. 4. 25. 11:33
무릉계곡으로 향하는 이른 아침 날씨는 침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조석에 앉은 아버지는 30년도 더 전에 친구와 무릉계곡에 놀러 왔던 이야기를 하신다. 고속철도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을 당시에 버스에 버스를 갈아타고 또 버스를 타서 무릉계곡에 오는 데만 8시간은 꼬박 걸렸다는 이야기. 젊은 시절 함께 무릉계곡을 여행했던 친구 분은 근래 심혈관 문제로 몸 안에 스텐트를 심은 이후, 좋아하던 술을 멀리하고 있단다. 무릉계곡에 들어가기 위해 입장료는 냈지만, 방문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짧은 산책. 그마저도 산책 흉내라 해도 좋을 만큼 짧은 거닐기였다. 아버지는 정말 선명히 기억하는지 알 수 없지만, 입산 구역의 주차장과 오래된 건물, 경계의 구획을 보면서 옛 기억을 확인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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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삶(Precarious Life)일상/book 2025. 4. 24. 17:34
오로지 두 입장만이 가능하다며 부시가 제안하는 이분법―“당신이 우리 편이 아니라면 테러리스트의 편이다!”―은, 둘 다를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고, 반대 입장의 틀을 형성하는 조건을 의문시한다. 더구나 그것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시대착오적인 구분으로 우리를 회귀시키고 그러한 감상적 환유(metonymy) 속에서 “문명”과 “야만”이라는 불쾌한 구분으로 우리를 회귀시키는 것과 똑같은 이분법이다.―p.23~24 우리는 마치 궁극적인 목적이 정확한 조준이기라도 하듯, 더 잘 조준하지 못한 것을 자책한다. …우리 자신의 행위는 테러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9‧11 사건으로 이어지는 적절한 선역사(先歷史)가 없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하기 시작하고, 어떻게 사태가 여기까지 왔는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