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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5. 실(絲)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1. 15. 17:53
이어쓰는 하와이 여행기. 여하간 두 번째로 묵었던 마운틴뷰의 방갈로에 대해서는 폭우로 인한 정전과 어둠 속에서 요리했던 것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고, 미국에서 '생존주의'란 무엇인지 몸소 깨닫게 된 계기였다. 오아후 섬으로 넘어가면서 알아본 숙소는 이번 체류 중에 유일한 호텔이었다. 와이키키 일대에는 굴지의 호텔들이 즐비한데, 그 가운데 내가 고른 곳은 모아나 서프라이더 호텔.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호텔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하와이에서 맨 처음 생긴 호텔이라는 서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에서 편리함과 호화로움을 택할 법도 하건만,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호텔까지 정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호텔에 묵게 된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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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주제 없는 글/印 2025. 1. 14. 12:07
사진을 갈무리하다가 지난 초가을 기상관측소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초가을이라고는 해도 계절관측목의 잎사귀 끝 하나 단풍으로 물들지 않은 푹한 날씨였다. 원래라면 구기동의 한 사찰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일정상 문제로 가까운 기상관측소에 가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서울 한복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따듯하고 한적한 풍경이었다. 지난 봄 벚꽃 개화를 알렸을 표준목을 저 멀리 두고 우리는 단풍나무 그늘에 앉았다. 날카로운 단풍잎의 날을 따라 햇살이 흩어졌고, 무성한 잎사귀의 갯수만큼이나 잔디밭에 드리워진 그늘은 짙었다. 고요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늘은 조금씩 농담(濃淡)을 바꾸었고, 단풍잎의 떨림에 따라 자세를 가다듬는듯 했다. 알맞은 크기의 돌에 걸터앉은 나는 남은 필름을 헤아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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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주의와 기술혁신주제 있는 글/營 2025. 1. 13. 12:22
David Autor, économiste au MIT : « L’un des aspects les plus dommageables du trumpisme est l’isolationnisme »Le professeur au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explique, dans un entretien au « Monde », comment la concurrence chinoise au début des années 2000 a détruit des emplois industriels aux Etats-Unis et alimenté le vote pour Donald Trump.Propos recueillis par Marie CharrelPublié le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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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 생존법일상/book 2025. 1. 12. 03:21
뒤르켐은 현대 사회가 스스로 실패를 인정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잔혹한 대가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낙오자들은 더 이상 불운 탓을 할 수 없으며, 내세에서 구원받으리라는 희망도 품을 수 없었다.—p. 15 우리는 계속해서 웃으라는,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즐겁게 지내라는, 휴일에는 환호성을 지르라는, 살아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런 요구가 없어도 이미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현대는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권리인 울적한 권리를, 비생산적일 권리를, 퉁명스러울 권리를, 혼란스러워할 권리를 박탈했다. 행복이 표준 상태여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현대가 우리에게 저지를 핵심적인 부당 행위다.—p. 19 19세기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은 특정 시대가 무엇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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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 like These)일상/film 2025. 1. 11. 11:21
What if it was one of ours? 몇 주째 영화가 보고 싶었던 요즈음 마침내 영화관을 찾았다. 내가 관람한 영화는 . 독특한 서사를 찾아 를 보고 싶기는 했지만 맞는 시간대가 없었던지라, 아무렴 이라도 좋았다. 일단은 영상이 마음에 든다. 프랑크 반 덴 에덴(Frank van den Eeden)이라는 촬영감독이 촬영을 총괄했다고 하는데, 그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내가 본 작품 중에는 2018년에 개봉한 이 있다. 은 공간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영화는 아니어서 영상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는데, 아일랜드 남부 웩스포드라는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장소와 인물이 한데 어우러져 멋진 영상을 만들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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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베이비부머주제 있는 글/<Portada> 2025. 1. 9. 00:57
Im Jahr 2024 mussten wir uns von einem lieb gewordenen Feindbild verabschieden: Der Boomer hat ausgedient. Schade eigentlich.Von Julia LorenzAktualisiert am 29. Dezember 2024, 6:45 UhrDieser Artikel ist Teil von ZEIT am Wochenende, Ausgabe 52/2024. 2024, 우리는 공공의 적에게 작별을 고해야 합니다. 애석하게도 베이비부머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Dies, liebe Leserinnen und Leser, ist ein Nachruf. Mit diesem Jahr verabschieden\ wir den so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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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즈음에주제 없는 글/印 2025. 1. 8. 01:51
# 크리스마스 마켓 성탄을 앞둔 주말 서울의 한 프랑스계 학교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에 다녀왔다. 이른 아침 오늘 시장이 선다는 C의 연락이 있었다. 이날 애매한 오후 시간대에 지인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에 예식장에 가기 전 잠시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켓에는 프랑스와 관련된 수제공예품과 먹거리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나에게 한 학기간 프랑스어를 가르쳐주었던 B와 B의 소개로 오랜 친구가 된 C를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럽에 여행을 가서도 들러본 적 없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서울에서 접하니 감회가 다르다. B와 C는 언제 보아도 밝고, C의 절친인 E는 여전히 강한 비음 섞인 프랑스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올해 봄부터 마크라메(Macramé) 재료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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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고통일상/book 2025. 1. 7. 23:50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자신의 현실적 실존 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표현한다.”……우리는 현실적 실존 조건이라는 외부의 필요성에 끼워 맞춰지고, 상상적인 것이라는 ‘자기의’ 필요성에 스스로를 끼워 맞춘다.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실존의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논리다.……저 일괴암 같은 문장, 자발적 복종의 거대한 공식의 의미는 이렇다. 우리는 오직 주체로서만, 오직 정체성을 가진 행동하는 주체로서만 훌륭하게 기능할 수 있다. 즉 자발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저절로 기능할 수 있다.—p.29, 35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낯선 외부의 이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새로운 ‘스스로의’ 이상으로 인정한다. 이 역설에 주목해야 한다. 일차적 나르시시즘 상태에 있는 인간을 방해하고 낙원에서 몰아내는 것은 처음에는 부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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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일상/film 2024. 12. 28. 11:08
많이 늦은 영화 리뷰, 미망.친구가 광화문을 좋아하는 나에게 추천해준 영화로, 모처럼 동행인이 있던 영화관람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극중 내내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자리한 광화문을 맴돌기는 하지만, 첫 장면은 옛 서울극장이 자리한 종로3가 일대에서부터 출발한다. 나중에 서울아트시네마로 이름을 바꾸었던 서울극장의 텅빈 관람석에 대한 아늑한 기억과 함께, 비좁은 골목길 철물점의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서 무심하게 주고 받는 남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계절은 여름에서 겨울로 건너가고, 인물들은 광화문과 종로 사이 어딘가를 배회하고, 누군가를 만났다가 헤어지고, 잊었다가 다시 떠올린다.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迷妄),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未忘), 멀리 넓게 바라보다(彌望), 그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