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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Conclave)일상/film 2025. 4. 27. 11:49
오디션 프로그램의 추기경 버전(?)이 있다기에 친구와 함께 보러 간 영화 . 보러가기로 하고 벌써 몇 주째 두 번을 미룬 영화였다. 출연정보에 레이프 파인즈가 있어 실망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종교라는 주제가 워낙 협소해서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초반부에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깜박 졸기는 했지만, 그 잠깐을 놓쳤어도 전체적으로 재밌게 봤다. 특히 같이 간 친구가 정말 재밌게 본 듯했다. 4월 중순으로 넘어가는 초순 하루 안에 사계절이 다 들어가 있던 이날은, 영화관을 나와 따뜻한 옹심이를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 했다. 개인적으로 콘클라베 개최를 선언하는 로렌스 추기경이 ‘확신의 위험성’에 대해 웅변하는 장면도 좋았지만, 마지막 로렌스 추기경과 베니테스 추기경 둘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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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시간여행/2025 끝추위 묵호 2025. 4. 25. 11:33
무릉계곡으로 향하는 이른 아침 날씨는 침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조석에 앉은 아버지는 30년도 더 전에 친구와 무릉계곡에 놀러 왔던 이야기를 하신다. 고속철도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을 당시에 버스에 버스를 갈아타고 또 버스를 타서 무릉계곡에 오는 데만 8시간은 꼬박 걸렸다는 이야기. 젊은 시절 함께 무릉계곡을 여행했던 친구 분은 근래 심혈관 문제로 몸 안에 스텐트를 심은 이후, 좋아하던 술을 멀리하고 있단다. 무릉계곡에 들어가기 위해 입장료는 냈지만, 방문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짧은 산책. 그마저도 산책 흉내라 해도 좋을 만큼 짧은 거닐기였다. 아버지는 정말 선명히 기억하는지 알 수 없지만, 입산 구역의 주차장과 오래된 건물, 경계의 구획을 보면서 옛 기억을 확인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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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삶(Precarious Life)일상/book 2025. 4. 24. 17:34
오로지 두 입장만이 가능하다며 부시가 제안하는 이분법―“당신이 우리 편이 아니라면 테러리스트의 편이다!”―은, 둘 다를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고, 반대 입장의 틀을 형성하는 조건을 의문시한다. 더구나 그것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시대착오적인 구분으로 우리를 회귀시키고 그러한 감상적 환유(metonymy) 속에서 “문명”과 “야만”이라는 불쾌한 구분으로 우리를 회귀시키는 것과 똑같은 이분법이다.―p.23~24 우리는 마치 궁극적인 목적이 정확한 조준이기라도 하듯, 더 잘 조준하지 못한 것을 자책한다. …우리 자신의 행위는 테러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9‧11 사건으로 이어지는 적절한 선역사(先歷史)가 없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하기 시작하고, 어떻게 사태가 여기까지 왔는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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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누구의 것인가일상/book 2025. 4. 17. 11:33
저작권의 최근 역사를 개인 자유와 권리의 성장으로 단언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20세기 후반 저작권법에 생긴 변화는 1604년부터 1914년까지 잉글랜드의 공유지를 거의 다 사유화한 인클로저 법(Acts of Enclosure)에서 이름을 따와 ‘뉴 인클로저(New Enlcosure)’라 불린다. ―p.22 지배적 합의에 어긋나는 저작물에 대해 처벌받음으로써 저작물을 ‘책임지는(own)’ 사람은 당연히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소유할(own)’ 수 있어야 한다. 즉 그 수익을 가져야 한다. ―p.49 지식 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창작물의 궁극적 기원에 대한 믿음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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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기다림인가?여행/2025 끝추위 묵호 2025. 4. 10. 14:33
바다날씨는 예측이 어렵다. 일전에 사전 답사차 영덕에 출장간 적이 있다. 공원을 둘러보는 동안 그곳에서 내가 만난 한 공무원은 날씨가 맑다고 해서 바다날씨가 반드시 좋은 건 아니라고 했다. 깃털구름 하나 없이 쾌청한 날이었다. 이번에 좌초된 울릉도 여행 계획은 그 날의 대화를 상기시켰다.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묵호항을 통해 도동항으로 들어가는 배편을 예약한 게 여행일로부터 한 달 전쯤. 동절기 막혀 있던 배편이 운항을 재개하는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울릉도 여행을 계획하게 된 건 아주 즉흥적이었다. 한번은 울릉도를 다녀온 친구가 섬에 공항이 들어서기 전에 그곳을 여행하라는 얘기를 했다. 공항이 들어서면 외지인들에 의해 평범해질 거라면서.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였다. 그 길로 다음날인가 배편을 예약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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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카테고리 없음 2025. 4. 2. 17:35
어둠 속에서 용식의 노란 홍채가 고요히 빛났다. ……여러 번 허물을 벗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인 채 존재하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했다.―p. 59 채운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날 일을 떠올렸다. 속으로 ‘또 시작이다’ 중얼거렸던 날. ‘하지만 이건 매번 시자되는 시작이라 시작이 아니다’라며 괴로워한 밤을.―p. 76 왠지 봐서는 안 될 이 세계의 비밀스러운 표정 하나를 얼핏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p. 121 서로 시선이 꼭 만나지 않아도, 때론 전혀 의식 못해도, 서로를 보는 눈빛이 얼마나 꾸준히 그리고 고요히 거기 있었는지 보여주는 거였다. 그러니까 말이 아닌 그림으로. ……그런 앎은 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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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짓들(Gesten)일상/book 2025. 4. 1. 08:55
어떤 몸짓이 더 많은 정보를 내포하면 할수록, 수신자가 그 정보를 읽기는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정보가 많을수록, 소통은 적어진다. 그 결과 어떤 몸짓이 정보를 적게 알리면 알릴수록(몸짓이 더 잘 소통할수록), 그만큼 몸짓은 공허해지고, 편안해지고, ‘예뻐’진다. 왜냐하면 그 몸짓을 읽는 데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p.17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세계가 ‘당연히 그러해야 하는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가설들은 문제를 제기한다. 존재론은 세계가 어떠한지를, 의무론은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방법론은 세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다룬다.―p.19 첫 번째 단계에는 목적 지향적 질문(‘무엇을 위해?’)이, 두 번째 단계에는 인과관계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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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섬(Motseom)일상/book 2025. 3. 31. 17:12
사진집을 읽는 건 오랜만의 일이다. 사진집이나 화집을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말 그대로 '보는 것'을 좋아할 뿐 막상 이런 유형의 책 '읽기'에는 익숙하지 않다. 한 권에 대여섯 개 정도의 삽화가 들어간 책이라면 몰라도, 이미지가 주를 이루고 텍스트가 간간이 끼어드는 이런 유형의 책은, 이미지를 죽 보고 있자면 머리에 저장되는 내용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텍스트로 눈길을 옮기자면 이미지들 사이에서 쉽게 지루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사한 사진집이나 화집을 보면 절로 시선이 가는데, SNS 유저들이 플랫폼 상의 '감성 가득한' 이미지를 손가락 끝으로 휙휙 넘기며 감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 경북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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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변천(半邊川)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3. 14. 15:37
서석지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국도 옆으로는 꽝꽝 얼어붙은 실개천을 따라 무채색의 단애(斷崖)가 펼쳐졌다. 절벽의 거친 단면은 마치 산봉우리가 겹겹이 포개어진 백제의 대향로를 연상케 했다. 낭떠러지는 수직낙하를 거부하듯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지류가 반변천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부드럽게 입수(入水)했다. 그 접면에는 사람의 왕래가 있을까 싶을 법한 신식 정자가 서 있다. 예의 얼어붙은 실개천은 어쩌면 바위보다도 단단해 보이고 흙보다도 불투명해 보였다. 겨울철 우리나라의 암석은 가장 본래의 색을 띤다. 초록(草綠)이 사라진 겨울 풍경 속 암벽은 그을음, 얼룩, 마모 따위의 흔적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다. 노령의 암석들에서 환부(患部)의 심상을 떠올렸다가, 인고(忍苦), 내강(內剛)의 추상적 개념을 발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