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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파리(竹波里)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2. 1. 17:46
왜 영양(英陽)이었냐고 묻는다면 그저 목적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 목적지가 없어도 어딘가에는 늘 도착해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그곳이 영양군, 그 안에서도 수비면, 그 안에서도 죽파리였을 뿐이다. 죽파(竹波),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눈앞에서 대숲이 너울댈 것만 같은 이 마을로 나를 이끈 것은 바로 자작나무 숲이었다. 겨울이 되고 오래 전부터 설경을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영양으로 오게 되었을 때 설국을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번 여정에서 나는 안동과 영양, 울진, 영덕을 차례로 들렀는데 이 중 영양에서만 산등성이의 북사면마다 눈이 녹지 않았다. 영양의 둥그런 산머리마다 밀가루를 체로 걸러낸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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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사일상/book 2025. 1. 31. 09:02
폴란드가 유럽의 규범에서 멀어진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유사한 도전과 선택에 부닥쳤던 보헤미아와 다르게 폴란드는 유럽 국가들의 틀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 그 결과로 폴란드는 좀더 후진적 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 대신 폴란드는 더 높은 수준의 독립성을 유지했다. 여러 개의 공국으로 분열되었을 때도 폴란드는 하나의 사회로서는 다른 곳보다 더 단일하고 단결된 상태로 남았다. 그 이유는 폴란드가 혼합적 군주제에 복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지리적으로 프랑스의 상당 부분은 영국 왕의 주권 아래 있었고, 독일 지역들은 프랑스 왕조의 통치 아래, 이탈리아는 노르만, 프랑스, 독일 군사 지도자의 승계 아래 있었다. 폴란드가 정치적 단위로서 살아남은 것을 보장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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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6. 밤(夜)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1. 30. 03:38
띄엄띄엄 써온 하와이 여행기를 급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사실 우천으로 인해 루아우 공연이 취소되었던 첫날부터 오아후에서의 일정은 그리 체계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아후에서 맞는 둘째날, 우리는 와이키키 해변을 따라 걸었고 그 다음에는 인근의 또 다른 호텔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잘 알아보고 고른 곳은 아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테라스에서 전날보다 나아진 햇살을 쬐며 식사를 하는 것까진 좋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이곳까지 렌트카를 끌고 왔는데, 주차해 놓은 2시간여 사이에 차가 견인된 것이었다. 눈앞에서 (내 차도 아닌 남의) 차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찔하기도 했고 전날 투스텝 비치에서 수영하면서 베인 발바닥이 욱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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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의 문법여행/2025 설즈음 영양과 울진 2025. 1. 29. 12:17
여행을 가겠다고 마음 먹었던 게 언제부터였던가. ‘쉼표를 찍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묻는 이에게 말한 적이 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새로운 리듬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내게는 바로 그 쉼표가 필요한 순간이 몇 달 몇 주 이어지고 있었다. 쉼표가 없이 문장을 잇고 또 이어도 꼭 비문(非文)은 아니듯이, 내 일상에 어떤 문법적 오류가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쉼표 없는 글쓰기에 맛들린 것처럼 일상은 무탈하게 굴러갔다. 하지만 하나의 문장이 문장답기 위해서는, 재밌는 이야기와 좋은 표현을 욱여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적절한 문장부호를 써서 읽고 말하는 흐름을 부드럽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알맞는 문장부호를 고르고 위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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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1900 展주제 있는 글/Arte。 2025. 1. 28. 10:53
예전에 「세기말 빈」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뭉뚱그려 동유럽 정도로 인식되는 오스트리아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전무했던 나에게, 이 책은 이들이 프랑스나 독일, 영국과 비견될 만한 걸출한 철학자와 과학자, 예술가를 배출한 나라라는 인식을 처음으로 심어주었다. 주위에 동유럽 여행간 이야기만 들었지 동유럽을 여행가본 일이 없는 나는, 처음 이 전시회 광고를 발견했을 때 막연한 궁금증이 일기도 했고, 당시에 책에서나 접했던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을 직접 보고 싶었다. 막상 전시실에 도착하자 예약제로 운영되었음에도 사람이 많아 관람하기에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기에 처음부터 작품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기보다는 눈대중으로 작품을 쭉 봤다가 눈에 띄었던 작품들을 다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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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5. 실(絲)여행/2024 미국 하와이 2025. 1. 15. 17:53
이어쓰는 하와이 여행기. 여하간 두 번째로 묵었던 마운틴뷰의 방갈로에 대해서는 폭우로 인한 정전과 어둠 속에서 요리했던 것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고, 미국에서 '생존주의'란 무엇인지 몸소 깨닫게 된 계기였다. 오아후 섬으로 넘어가면서 알아본 숙소는 이번 체류 중에 유일한 호텔이었다. 와이키키 일대에는 굴지의 호텔들이 즐비한데, 그 가운데 내가 고른 곳은 모아나 서프라이더 호텔.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호텔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하와이에서 맨 처음 생긴 호텔이라는 서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에서 편리함과 호화로움을 택할 법도 하건만,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호텔까지 정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호텔에 묵게 된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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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주제 없는 글/印 2025. 1. 14. 12:07
사진을 갈무리하다가 지난 초가을 기상관측소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초가을이라고는 해도 계절관측목의 잎사귀 끝 하나 단풍으로 물들지 않은 푹한 날씨였다. 원래라면 구기동의 한 사찰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일정상 문제로 가까운 기상관측소에 가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서울 한복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따듯하고 한적한 풍경이었다. 지난 봄 벚꽃 개화를 알렸을 표준목을 저 멀리 두고 우리는 단풍나무 그늘에 앉았다. 날카로운 단풍잎의 날을 따라 햇살이 흩어졌고, 무성한 잎사귀의 갯수만큼이나 잔디밭에 드리워진 그늘은 짙었다. 고요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늘은 조금씩 농담(濃淡)을 바꾸었고, 단풍잎의 떨림에 따라 자세를 가다듬는듯 했다. 알맞은 크기의 돌에 걸터앉은 나는 남은 필름을 헤아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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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주의와 기술혁신주제 있는 글/營 2025. 1. 13. 12:22
David Autor, économiste au MIT : « L’un des aspects les plus dommageables du trumpisme est l’isolationnisme »Le professeur au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explique, dans un entretien au « Monde », comment la concurrence chinoise au début des années 2000 a détruit des emplois industriels aux Etats-Unis et alimenté le vote pour Donald Trump.Propos recueillis par Marie CharrelPublié le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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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 생존법일상/book 2025. 1. 12. 03:21
뒤르켐은 현대 사회가 스스로 실패를 인정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잔혹한 대가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낙오자들은 더 이상 불운 탓을 할 수 없으며, 내세에서 구원받으리라는 희망도 품을 수 없었다.—p. 15 우리는 계속해서 웃으라는,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즐겁게 지내라는, 휴일에는 환호성을 지르라는, 살아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런 요구가 없어도 이미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현대는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권리인 울적한 권리를, 비생산적일 권리를, 퉁명스러울 권리를, 혼란스러워할 권리를 박탈했다. 행복이 표준 상태여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현대가 우리에게 저지를 핵심적인 부당 행위다.—p. 19 19세기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은 특정 시대가 무엇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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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 like These)일상/film 2025. 1. 11. 11:21
What if it was one of ours? 몇 주째 영화가 보고 싶었던 요즈음 마침내 영화관을 찾았다. 내가 관람한 영화는 . 독특한 서사를 찾아 를 보고 싶기는 했지만 맞는 시간대가 없었던지라, 아무렴 이라도 좋았다. 일단은 영상이 마음에 든다. 프랑크 반 덴 에덴(Frank van den Eeden)이라는 촬영감독이 촬영을 총괄했다고 하는데, 그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내가 본 작품 중에는 2018년에 개봉한 이 있다. 은 공간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영화는 아니어서 영상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는데, 아일랜드 남부 웩스포드라는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장소와 인물이 한데 어우러져 멋진 영상을 만들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