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의 북서 방면으로 그리 깊숙하게 들어가지 않은 곳에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소나무길이고 다른 하나는 서어나무길이다. 동쪽으로 곧게 뻗은 소나무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서어나무길이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굽이굽이 뻗어나간다. 서오릉의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 일대는, 창덕궁의 비원처럼 사람의 손길이 많이 미치지 않아 자연적인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서오릉으로 말하자면 서울의 동쪽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 다음으로 왕릉군 가운데 두 번째로 커다란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 조선 초기(세조의 맏아들(덕종)과 예종 시기)와 조선 후기(숙종과 영조대 시기)의 왕릉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 싱그러운 소나무를 보고 싶다면 예의 소나무길보다도 익릉의 양옆으로 들어선 소나무숲을 보는 것을 권할 만한 곳이기도 하다. 아주 잠시 서울을 벗어났을 뿐인데 이런 소나무를 실컷 볼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다. 사람 가득한 서울 곁으로 여러 차례 전쟁까지 견딘 소나무들이 이렇게 초연하게 서 있을 수 있다니, 하면서.
한편으로는 울창한 소나무숲이 주는 탁트인 느낌이 좀 아이러니하게도 느껴진다. 조선을 혼란에 빠뜨린 대기근이 있은 뒤에도, 숙종과 영종은 종묘사직을 기리기 위해 넓디넓은 왕릉을 세우는 데 여념이 없었던가, 하는 생각이 뒤따라온다. 서오릉의 서쪽 끄트머리에는 숙종의 후궁에서 경종의 생모가 된 장희빈을 모신 대빈묘가 있다. 지금은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지도 10년이 넘었고, 잘 다듬어진 잔디가 깔린 경치가 운치 있게도 느껴지지만, 당시를 살아갔던 사람들에게 이 거대한 왕릉들은 어떤 존재였을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뒤이어 들어선 소나무길에는 십수 년마다 주기적으로 묘목을 심어 놓아서, 같은 시기에 식재된 소나무들은 서로 닮은꼴을 하고 있었다. 눈이 온 뒤 기온이 올라가 흙길은 걷기에 약간 불편함이 느껴질만큼 질척였다. 소나무길은 대체로 완만한 오르막길로 다행히 볕을 받는 방향에 있어서 길이 단단하게 마른 상태였다. 이윽고 서어나무길에 들어서면 반대로 볕이 잘 들지 않는 곳에 있어서 눈이 녹지 않은 채로 길을 덮고 있고, 그 상태로 완만한 내리막을 이룬다. 물고기에 비유하자면 1급수에만 산다는 서어나무, 살면서 서어나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았다. 서어나무가 도시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나무라는 걸 아버지 말씀을 들어서야 안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소나무, 물푸레나무, 느티나무, 그리고 서어나무. 서어나무길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 그러니까 몸집이 꽤 큰 서어나무들이 나타나는데, 서어나무에서 처음 받은 인상은 차돌멩이 같다는 것이다. 모든 수분을 뺏겨서 아주 빳빳한 표피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수분을 들이지 않기 위해서 빈틈없는 살갗으로 무장한 것인지, 아주 오묘한 질감을 가진 나무다. 겨울이라 잎사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봄여름이 되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나무라는 것이 광합성을 하는 생물이기 때문에 수분의 출입이 없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서어나무의 매끄러운 기둥에서는 무언가를 가두고 배척하는 강단 같은 것이 느껴진다. 이런 비유가 적절하다면 비쩍 마른 갈색 뱀들이 휘휘 뻗어오른 느낌이랄까.
아직은 낮이 짧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다는 말 그대로, 이 언덕길에서는 지글지글 타오르는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가는 게 가까이서 보인다. 맞아 저기가 서쪽이겠구나, 새삼 생각한다. 미처 녹지 않은 눈이 사라지는 지점에는 한 줌만큼의 석양이 간신히 내 목덜미를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