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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英陽)에 머물며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3. 5. 03:20
2월초 진관동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것이, 2월말이 되면 무대를 영양으로 옮긴다. 조금씩 위치가 다르기는 하지만 경상북도에는 유난히 ‘영’이라는 말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영양, 영덕, 영주, 영천. 별 건 아니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이 네 곳 모두 다 다른 한자를 쓴다는 점이다. 英陽, 盈德, 榮州, 永川. 직접 차를 몰아 도착했던 영양은 원래 지난해 안동 일대를 여행하면서 한 번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서울과 영양을 오가는 버스가 있어도 자동차가 아니면 접근하기 힘든 곳이다. 인구도 전국 지자체 가운데 울릉군 다음으로 가장 작은 곳) 당시에 영양에 와보고 싶었던 이유는 맹동산 일대에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장관이라는 글을 인터넷 어딘가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궁화호를 타고 안동에 다다랐던 나에게 대중교통으로 영양을 관광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1월까지는 지겨울 만큼 서류를 보내는 일이나 모자란 서류를 보완하는 일, 이런저런 지원현황을 체크하는 일로 여념이 없었는데, 그래도 3월 봄이 오기 전까지는 국내 여행을 다녀와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었다. 후보군이 몇 곳 있었는데, 우선 독일마을이 자리한 남해에 가보고 싶었고, 아예 동쪽으로 틀어 울릉도와 독도를 여행해보고 싶기도 했다. 짬짬이 머릿속으로 여행 루트만 그리다가 마침 영양이 생각 났고, 2월 들어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낫겠다고 판단, 그 길로 영양으로 향했다. 남해나 울릉도는 막상 오가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도 반영된 선택이었다.
동행했던 부모님은 영양을 ‘오지 같은’ 곳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 영양은 요즘 그 흔한 고속도로도 찾아보기 어려워서 대부분 어디를 가려면 구불구불한 국도를 뱅뱅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지도상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도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면 1시간 거리라고 뜨는 것이다. 우리가 영양에서 머물기로 했던 곳은 산중턱에 자리잡은 작은 책방으로 비포장 산길을 한참 들어가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책방에는 마당과 창고용 별채가 있었고,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긴 건 꼭꼬꼭꼬 부리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수탉과 까만 털에 밤색 눈썹을 하고 있는 귀여운 강아지였다. 누나에게 집에 맡겨두고 온 강아지가 생각나는구나. 이 녀석, 꼬리를 수평으로 내린 채 연신 달랑달랑 흔들면서도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다. 가로등 아래에 제대로 주차를 해놓고 마당으로 들어가니, 그제서야 선반 위 낡은 흰색 상자 안에서 길고양이가 숨죽여 기지개를 켠다.
북스테이. 단 이틀에 불과한 체류지만 여기서라면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냥 계속 눌러앉고 싶다. 예전에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벙갈로에 들어가 하루종일 골몰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도 그런 벙갈로가 하나 있었으면 했다. 나이가 들고 돈도 얼마만큼 모일 나이가 되면 그런 나만의 공간을 꾸릴 수 있을까, 하곤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방은 그런 목적에 딱 알맞는 곳이었다. 책방 안에 진열된 헌 책과 새 책을 보면서, 책방 주인의 세계를 조금씩 해독한다. 철학, 수필, 귀농, 음식, 한국소설. 자주 접해본 적이 없는 세계인데 알고 싶어지는 세계다.
실내에 오면 책이 가득하고, 바깥으로 나가면 전원풍경이 펼쳐지는 이곳을 부모님도 흡족해 하신다. 동향으로 창이 난 이 가옥의 정면 저 멀리에 버티고 서 있는 산 위에서는 앙상한 나무들이 저물어 가는 석양을 받아 가마에서 갓 나온 쇠꼬챙이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나무의 기묘한 색깔을 보며 아버지는 살며 처음 보는 나무로 착각을 하신다. 이윽고 밤이 되면 하늘의 별이 가까워진다. 이불 안에 몸을 파묻듯 다시 책방으로 기어들어간 나는 사랑에 관한 몇 가지 책을 뒤적인다.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던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넘기고 싶었는데,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에 빠져든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평온함이다. 영양은 지금도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첫 발걸음에 마음이 편안한 장소를 발견한다는 건 실로 감사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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