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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盈德)은 바다다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3. 29. 01:17
국도를 운전하는 것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영양에는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 하더라도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잡아먹는다. 맹동산 풍력발전단지를 거쳐 영덕으로 가는 데는 도합 두 시간 가량이 걸렸다. 국도 옆으로는 이 지역의 특산품인 사과나무의 맨들맨들한 나뭇가지마다 한낮의 뙤약볕이 흐릿하게 부딪친다. 병에 걸린 손가락처럼 마디가 굵은 나뭇가지에는 열매도 잎사귀도 남아 있지 않다. 국도를 운전할 때는 이런 크고 작은 풍경들을 마주하는 것이 정겹다. 주마간산으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풍경이다.
우리 일행은 강구항으로 곧장 가는 대신 영덕군의 북쪽에 자리잡은 오보리 쪽으로 빠져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여기에는 어쩐지 번화한 곳(강구항)일 수록 먹을 만한 장소를 찾기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바다에 온 만큼 구글맵에서 평이 나쁘지 않은 횟집을 찾아두었다. 함석으로 된 미닫이문을 여니 식사하러 오셨냐는 할머니의 억양에는 짙은 경상도 사투리가 베어 있다. (매번 헤아려 보려고는 하지만 경북 사투리와 경남 사투리는 아직도 구분하지 못한다*-*) 중짜리 모듬회를 주문했는데 웬걸 우리는 세코시(背越し)로 알고 있는 회가 나왔다. 회를 가지런히 저며 무채 위에 올려 놓지 않고, 이렇게 잘게 썰어먹는 게 이곳에서는 일반적인 건가?!
영양에 오는 데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었듯, 영덕에 온 데에도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영덕하면 떠오르는 ‘대게’를 서울에 사가고 싶다는 어머니의 작은 소망과, 오랜만에 수평선을 바라보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합쳐져 영덕으로 걸음이 이끌렸던 것이다. 때문에 대게 직판장에도 들러보았지만, 대게값—최하품도 10만 원 위에서 출발한다—이 예상가격을 훨씬 뛰어넘는 바람에, 강구항의 조그마한 수산시장에서 해삼과 소라를 조금씩 사는 것으로 만족했다.
내가 바라는 바다는 시야를 가릴 게 없는 너른 모래밭에서나 볼 수 있을 텐데, 이곳 강구항은 이미 너무 많은 사물로 에워싸여 있어 생각을 흐트러뜨릴 뿐이었다. 콘크리트 부둣가, 낡은 어선, 어수선하게 걸린 현수막, 일방통행로에 가까울 만큼 비좁은 도로를 메운 자동차들, 군데군데 벽돌이 뜯겨져 나간 이층 건물들. 내 시선은 어디에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한동안 어선과 어선 사이를 맴도는 갈매기들의 날렵한 날개 끝 너머로 하늘을 쫓는다. 그마저도 착 가라앉은 하늘은 무거운 색을 드리운 채 날카로운 모든 선(線)들을 뭉개버린다. 기대와 다른 바다를 앞에 두자니 불쑥 어질러진 생각의 방에 들어선 것 같다. 멈출 리 없는 시간은 이들을 정리할 여유를 허락해주지 않았고, 나는 그런 시간을 걷어차듯 터벅터벅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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