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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버들이 쉴 적에(注山池)여행/2021 늦겨울 작은 여행들 2021. 4. 13. 17:19
게으름으로 늦겨울 여행에 대한 기록을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그 당시에 다녀왔었던 곳들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다. 그 사이 벚꽃이 피고 졌고 노란 민들레꽃은 홀씨가 되었다. 당시 청송을 들르면서 반 년 전에 갔었던 주왕산을 스치듯이 지나왔다. 주봉을 올랐던 당시와 비교하면, 대전사에서 용추폭포를 오가는 단출한 산책이었다. 장마철의 무성(茂盛)함을 느낄 수야 없는 일이지만, 주왕산은 본래 기암절벽이 볼거리를 주는 곳인지라 늦겨울에 와도 주왕산의 독특함은 여전하다. 늦겨울의 시루봉은 장마철의 시루봉 그대로이고, 바싹 마른 장군봉은 녹음에 가리워진 장군봉 그대로이다.영양에서 영덕으로, 그리고 영덕에서 영양으로 되돌아오는 길 중간에 우회하여 주산지에 들렀다. 지난 여름에 미처 들르지 못했던 곳으로, 대중교통으로는 어지간해서 닿을 수 없는 곳이다. 늦겨울까지는 제법 추운 법이고, 앙상한 나무들은 밑동에서 썩지 않은 잿빛 낙엽들을 내버려둔 채 사면의 굴곡을 여과 없이 노출한다. 가만히 주의를 기울인다면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헤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물가에 군락을 이룬 나무들은 가지끝마다 푸르스름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데, 봄을 맞이하는 새순인지 그저 따사로운 석양이 반사된 것인지 모르겠다. 산자락 군데군데에서 계절도 잊은 채 푸르름을 잃지 않은 상록수들은 벌거벗은 나무들의 초라함을 오히려 더욱 대비시킬 뿐이다. 그렇게 해서 주산지에 움직이는 것은 소리도 내지 않고 쉼없이 형태를 바꿔나가는 잔물결뿐이다. 하나하나의 운동들은 다가오는 노을을 밀어내기도 하는 것 같고 잽싸게 끌어당기는 것 같기도 하다.
여름에 수해를 많이 입는 지역이다보니 오래된 왕버들 나무들이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간다. 그래서 몇몇 곳에는 저수지 안에 왕버들을 조성하고 있다. 지금은 저수지로서의 유용성조차 크지 않은 곳이지만, 사람들의 볼거리를 위해서 육중한 왕버들을 새로이 가꾼다는 게 어쩐지 굉장히 인간중심적인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포늪에서 습지 복원을 위해 나무들을 양생하는 것은 보았지만 말이다. 모든 가능성이 인간에 의해 결정되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이스라엘 연구에 따르면, 인간과 가축의 무게(1억 6천만t)는 전세계 생물량의 96% 가량을 차지한다고 한다. 거꾸로 얘기하면 우리가 TV 속에서 신비롭다며 보는 야생동물이 지상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4% 남짓(700만t)이라는 뜻이다. 모든 것의 존재 이유가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가는 세계는 지속가능할까. 성장이 지상과제인 우리나라에서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내가 보기에는 다 큰 어른이 생각은 성숙하게 기르지 않은 채 더 자라겠다고 애를 쓰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말이다. 뜬금없는 물음표를 던지며 이번 여행의 마지막 기록을 마친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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