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암미술관과 셋이서 문학관 옆길을 따라 걷다보면 북한산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독립운동을 했던 진관사의 한 스님의 이름을 따 백초월길이라 부르는데, 백초월길을 따라서 일주문을 지나고 극락교를 건너면 방문객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마애아미타불이 나타난다. 그리고 불상의 시선이 머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계곡 너머 칙칙한 솔잎 사이로 풍화된 석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홍제루(弘濟樓)에 이르기까지 왼편으로 는 성긴 돌담이 줄지어 있다. 그리고 남동향으로 서 있는 홍제루의 낮은 마루 아래에는 색색의 연등이 빈틈없이 달려 있어, 그 밑에 들어서면 아늑한 다락방에 올라온 느낌이 든다. 홍제루를 지나 명부전(冥府殿)으로부터 대웅전에 이른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들은 아니다. 하지만 정감 있고 아담한 느낌이 있다. 터키옥 색깔의 기와를 이고 있는 명부전을 빼면, 다른 건물들 위에는 이날의 날씨에 걸맞게 먹구름 낀 잿빛 기와가 얹혀 있다. 평소 관리를 열심히 하는 듯 단청과 벽화, 지붕 모두 흐트러짐 없이 완성된 느낌이 있다.
사실 진관사의 하이라이트는 진관사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칠성각(七星閣)에서부터 예의 마애아미타불까지 초승달 모양을 그리며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숲이다. 진관사를 호위하는 보살들처럼 높낮이가 다른 소나무들이 초록빛 안개띠를 이룬다. 더 멀리로는 북한산에서 뻗어나온 암반들이 짙은 안개에 가려진 모래밭처럼 하늘에서 들이닥치는 파도를 서서히 받아들인다. 그렇게 말로만 듣던 것과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서울 안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는데 이제야 왔구나, 하고.
이 짧은 여정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마음에 담아둔 건물은 정방형의 동정각(動靜閣)이었다. 이 건물에는 범종이 들어가 있는데, 옛 사람들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살문을 빽빽하게 쳐놔서 범종의 온전한 모습을 보기도 쉽지 않다. 어쨌든 삼청동의 동십자각이나 광화문의 기념비전처럼 큐브 형태의 오래된 건물을 보면 괜히 자꾸 시선이 간다. 그 모양이 앙증맞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위 건물들과 독립된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의 세심교(洗心橋)로 빠져나와 한동안 주위의 솔밭을 더 깊은 곳까지 찾아다녔다. 계절에 얽매이지 않는 소나무는 잠시 시간의 망각을 허락해 주었지만, 그렇다고 늦겨울의 눅눅하고 차가운 공기까지 걷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