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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II여행/2021 한여름 세 도시 2021. 7. 14. 00:04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뒤 향한 곳은 정림사지다. 처음 여행을 왔을 때 들렀던 곳이지만 벌써 기억에서 가물가물하다. 이전에 들러본 적이 없는 곳을 둘러볼 계획이라곤 해도 부여에 왔는데 아무리 그래도 정림사지는 보고 가야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에 도착한 정림사지에는 인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는데, 지난번 부여를 여행 왔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덕분에 한적하게 정림사지의 오층석탑과 석불좌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저번 여행과 달라진 점이라면 정림사지 내부의 박물관이 리노베이션했다는 점이다. 큰 기대 없기 박물관으로 들어갔는데, 디지털 방식으로 정림사지의 이모저모를 소개하고 있어서 세부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석탑과 와당(瓦當)에 대한 설명 부분을 재미있게 보았다. 정림사지박물관을 다 둘러본 다음에도 이상한 아쉬움이 들어서 뭐가 빠져 있는 것인지, 지난 번 부여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생각을 해보니 지난 부여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건축물도 자연경관도 아닌 '백제금동대향로'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금동대향로는 복제본이고 부여국립박물관에 전시된 금동대향로가 원형이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한국사 교과서의 전면에 크게 실려 있었던 금동대향로는 실물을 볼 때라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고 단언한다. 오로지 백제금동대향로를 보기 위해서 정림사지 바로 맞은 편에 있는 부여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부여국립박물관은 코로나 이후부터는 예약제로 운영이 되고 있어서 아차 싶었는데, 다행히 정원을 초과하지 않아서인지 현장에서도 곧바로 입장절차를 진행해주었다. 암실처럼 어두운 독립된 작은 공간에 전시된 백제금동대향로는 다시 보아도 멋있다. 아릅답다, 멋있다, 화려하다, 은은하다, 세련스럽다 등등의 여러 형용사 가운데 어떤 표현이 가장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그 오래 전 금으로 향로라는 도구를 만들기 위해 이만큼 공을 들였다는 것에 경외심마저 품게 한다.
늦은 아침으로 만약을 대비해 전날에 사둔 빵오쇼콜라를 먹은 탓에 딱히 점심 먹을 생각을 들지 않았다. 아직 규암마을을 제대로 둘러보지 않았으므로 규암마을로 되돌아가야 하긴 할 텐데 하면서 조금 뜬금없는 지역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가 간 곳은 부여군 임천면의 어느 카페였는데 얼마전 방송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는 곳이었다. 부여 시내로부터는 채 30분이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부여 안에서도 금강 하구에 가까운 곳이고 그 말인즉슨 이웃 도시 군산과 인접하다는 뜻이다.
방송을 보고서 이곳을 찾게 되었다고 주인 아주머니께 말을 건넸더니, 그 방송을 탄 것이 벌써 여섯 번째란다. 그래서인지 대도시보다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는 데도 불구하고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만석이었다. 가게가 크지 않은 탓도 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허름한 농가를 방앗간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취재기자들이 관심을 보여왔고, 그 때문에 지역민들보다도 외지인들에게 먼저 알려진 곳이라고 한다. 원래는 방앗간으로만 운영하단 것을 카페까지 겸하게 된 게 불과 1년 남짓된 일로 더욱 이름을 알리게 된 것 같다. 그 덕에(?) 잠시 대기를 해주셔야 할 것 같다며 미안해 하는 아주머니의 말씀과 함께 그 사이 둘러볼 만한 주변 산책로를 알려주셨다.
땡볕을 둘째로 하더라도 습기가 아주 강한 날이었기 때문에 그냥 차에 들어가 기다릴까 생각을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둑방길로 나가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금강이 바라다보이는 둑방길이 있었다. 여름날씨에 이런 물가와 무성한 수풀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창녕 우포늪이 먼저 떠오른다. 날씨가 날씨인지라 바깥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 카페로 되돌아왔다. 마침 자리가 비어서 창가 쪽 자리에 앉을 수 있었는데, 차마 챙겨온 책을 느긋하게 읽을 수는 없었다. 인적 하나 없는 논길을 가로질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가 서비스로 내어주신 떡과 커피를 멋있게 먹고, 집으로 가져갈 쇠머리찰떡을 하나 사서 다시 차에 올라탔다.
슬슬 시장기를 느낄 즈음 다시 규암마을로 돌아왔다. 점심시간을 꽤 넘긴 때였기 때문에 붐비지 않는 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겠거니 기대했건만 웬걸 이곳 역시 오후 두 시를 넘긴 시각에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전날에는 식사를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빵오쇼콜라만 사들고 갔지만, 오늘은 더 이상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 전화번호를 걸어두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근처 상점가를 돌아다니며 최근 이 동네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가게들을 기웃거렸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고르곤졸라 크림파스타였는데 독특하게도 매운 맛이 가미되어서 매운 맛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적격이었다. 이신치열(以辛治熱), 캡사이신을 섭취하고 나면 늘 그렇듯 기운이 나고, 이는 더운 날씨에도 마찬가지다. 부여는 워낙 소도시인 만큼 붙어 있는 몇몇 관광지를 둘러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나의 시선의 끌어당기는 것은 단연 소규모 책방이었으므로, 이런 책방들을 위주로 돌아다녔다.
먼저 내가 들어간 곳은 아동용 책들을 주로 취급하는 곳이었다. 한켠에 일반서적들도 판매하고는 있지만 가게 전체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구성되어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장난감 같은 공예품을 만드는 공간도 함께 달려 있었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찾기에 어린이 책방은 그리 적당한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에, 걸어서 5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또 다른 책방으로 향했다.
두 번째로 간 책방에서는 국내 작가들의 책, 특히 시집들이 눈에 띈다. 영양의 산골짜이에 있었던 책방처럼 이곳에서도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대형서점에도 어딘가에는 이런 책들이 꽂혀 있을 텐데 왜 좀처럼 눈에 띄지 않을까 생각을 하면서, 몇몇 책제목에 꽂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읽지 않은 책이 집에도 많기 때문에 우선은 작가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는 것으로 만족한다.
원래 서점을 위한 용도로 지어진 것이 아닌 게 분명한 이 건물은 원래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이 마을에는 다방, 약국, 이발소처럼 더 이상 손님을 찾지 못하고 폐허로 남아 있는 건물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리고 이런 건물들에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쓰임새를 불어넣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에서 도시재생에 역점을 두고 지원책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가게들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꾸준히 수익이 나야 할 텐데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꺾일 즈음 다시 서점을 나왔고 백마강 옆으로 길다랗게 난 아스팔트길을 따라 걸었다. 다음으로 어디를 가볼까 하다가 정림사지만큼 부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낙화암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번 여행에서는 부소산성을 통해 직접 낙화함을 가보았다면, 이번에는 백마강 맞은 편에 서서 낙화암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