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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I여행/2021 한여름 세 도시 2021. 7. 18. 11:29
몇 년만에 다시 찾는 대전인지 모른다. 3년간 시간을 보냈던 대전은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있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 다시 한 번 찾고 싶은 곳이었다. 대전에서 내가 하루 머물렀던 곳은 도마동의 저렴한 숙소였다. 대전에 있을 당시 유성구에 있었고 서구로 나오더라도 둔산까지만 나왔었기 때문에 도마동은 처음 가보았다. 딱히 잠잘 곳이 근사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둔산이나 대전역 근처의 비싼 숙소를 대신해 도마동에 머무르기로 했다. 하지만 대전에 와서 둘러보려고 했던 곳들은 예전에 시간을 오래 보냈던 유성구 일대였으므로, 간단히 짐 정리를 하고 도마동을 빠져나와 유성구로 향했다.
301번 버스를 타고 은하수 네거리와 둔산, 정부청사, 만년동을 지나 연구단지 네거리에 도착했다. 연구단지 네거리는 좋아하는 가게가 참 많은 곳이었고, 이곳에서 잡았던 약속들도 기억에 남을 만한 것들이 많다. 원래는 매우 낡은 저층 아파트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신축 아파트가 들어섰고 이곳의 풍경도 꽤 바뀌었다. 내가 즐겨찾던 곳들도 많이 사라졌다. 시간이 흐른 것이다.
사라진 것들
"타르뜰레뜨" 이 네거리의 한 길목 모퉁이 이등변삼각형 꼴로 된 공간에 아담한 카페가 있었다. 가게이름 그대로 조그만 타르트를 함께 판매하는 곳이었다. 저녁이 되면 이곳에서 책을 읽으며 수시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자몽타르트, 무화과타르트, 서양배타르트 등등 각양각색의 타르트들이 계절에 따라 진열대에 나타났다 사라졌고, 가끔은 몇몇 타르트를 맛보기도 했다. 이 가게는 내가 아직 대전에 머무르던 때 문을 닫았다. 그 이후 '노르웨이 숲'이라는 카페가 들어섰지만 그다지 발길을 들이지 않게 되었다.
"타코 앤 누들" 앞서 말한 아주 허름한 저층 아파트에는 작은 상가가 달려 있었다. 타코와 누들은 바로 그 상가의 협소한 공간에 자리잡은 퓨전 일식 가게였다. 밖에서 보았을 대 영어 알파벳으로 적어 놓은 'Taco and Noodle'이라는 문구가 잘 눈에 띄지 않고 아는 사람만 찾는 곳이었다. (Tako가 아닌 Taco를 써서 처음엔 멕시코 요리를 하는 곳인 줄 알았다.) 테이블이라곤 3개 정도뿐이었고, 그마저도 아는 사람들이 꾸준히 찾아서 조금만 늦어도 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한번은 S와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사케를 곁들이며 대화를 하는데 다짜고짜 나를 보고 '너는 아보카도 같다'고 했다. 그가 취했다고 생각했다. 무슨 뜻이냐 물었더니 겉은 물렁물렁해 보이지만 속은 단단하다는 뜻이란다. 이 가게는 내가 대전을 떠날 때까지도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예의 오래된 아파트가 허물어지면서 이번에 와서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리브리스" A와 갔던 이곳은 연구단지 네거리 안쪽 주택가에 자리잡은 아담한 홍차 가게였다. 당시에는 서울에서도 홍차 가게가 그리 흔하지 않던 때라 궁금증을 가지고 갔는데 우리 모두 이곳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나는 신문물이라도 접한 사람처럼 홍차 한 잔을 다 마신 다음 욕심을 내어 또 다른 홍차를 주문했다. 곳곳에 책이 꽂혀 있어 거대한 서재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가게가 문닫을 즈음이 되어 계산을 할 때 노부부와 잠시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내일이 마지막으로 영업하는 날이라고 했다. 인상 좋은 두 노부부는 가게를 정리하고 나면 제주도에 내려갈 계획이라고 했다. 좋은 공간을 너무 뒤늦게 알게 되어 아쉬움이 컸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다음날 혼자 다시 한 번 가게를 찾았고, 아주머니는 아쉬워서 또 왔냐며 반갑게 맞아 주셨다.
남겨진 것들
"가남지" 일주일에 한 번은 찾았던 가게. 매운 똠양 쌀국수를 먹으면 한 주의 스트레스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똠양 맛을 알려준 곳이기도 하다. 재료도 신선하고 (특히 해산물이 그렇다) 바나나 생과일 주스와 함께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당시에는 한 끼 치고 꽤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여겨졌는데, 그 사이 물가가 많이 올랐고 평범한 쌀국수를 비싸게 파는 곳도 늘어서 가성비도 괜찮은 것 같다. 모든 것이 예전 모습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공간이 작아진 느낌도 들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Cornerstone: H" 스포츠센터 뒤편 골목으로 들어가다 보면 노출 콘크리트를 활용한 멋스런 건물이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에 야외 테라스가 널찍한 카페가 하나 있다. 일본의 호리구치 커피를 사용하는 이곳은 메뉴부터가 심상치 않다. 프렌치, 풀시티, 시티 등등 다소 낯선 명칭들이 등장한다. 약간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면서도 내가 이곳에서 고르는 메뉴는 초콜릿 향이 풍긴다고 소개되어 있는 풀시티로 늘 정해져 있다. 다행히 이 카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연구단지 네거리에 간 김에 이곳에서 초저녁 더위를 가라앉혔다. 이곳의 매력은 커피보다도 크림 브륄레가 아닐까 싶다. 떫은 커피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브륄레는 어울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이후로는 연구단지 네거리에서 정부청사 근처까지 일직선으로 쭉 걸어보았다. 그러다 보면 유성구와 서구를 가르는 갑천을 자연히 건너게 된다. 개발 계획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던 엑스포공원에는 야외수영장이 있던 자리에 웬 어슷한 마천루 하나가 올라가 있었다. 그리 유동인구가 많은 곳은 아니었는데, 백화점도 들어서고 기업들이 입주하면 아마 사람들의 왕래도 늘 것이다. 한 기업의 야심찬 프로젝트로 지지부진했던 개발사업에 속도를 올리고 이 거대한 건축물이 갑천 바로 옆에 들어선 모양이다. 새삼 기업의 힘이 느껴진다. 신축 빌딩 오른쪽으로 늘어선 한빛탑과 엑스포다리가 왜소해 보일 정도다.
만년동을 가로질러 대전지방 보훈청에 이르기 전 버스정류장에서 다시 301번 버스를 탔다. 마음 같아선 타임월드까지 더 걸어보고 싶었지만 한여름의 끈적임을 견디는 건 이 정도에 마무리하기로 했다. 301번 버스는 그 길로 나를 도마동의 대전지방 조달청 앞까지 바래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