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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6일의 일기: 몽주 광장Vᵉ arrondissement de Paris/Janvier 2022. 1. 16. 19:29
이곳의 행정은 매우 더디고 비효율적이고 복잡하다. 간단한 정보를 구하기 위해서 동일한 문의를 반복해야 한다. 그 절차 또한 정형화된 것이 아니다. 여행온 것이 아니라 학업을 하러 온 나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참 답답하다. 프랑스어 수업을 함께 듣는 학생들에게 내가 처한 상황(내일이 개강인데 수강신청을 하나도 하지 못한 상황)을 이야기하니, 법학을 공부하는 한 이탈리아 친구는 완전히 공감한다고 말한다. 이번이 두 번째 학기인 그도 똑같은 상황을 경험했다고. 이탈리아의 행정절차 또한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아는데, 그런 그가 내게 공감을 표하는 걸 위안 삼아야 하는 상황이다.
# 전날 저녁까지 거르고 잠들었기 때문에 이른 아침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주말에는 학생식당도 닫는다. 내가 향한 곳은 무프타흐 시장 초입에 자리한 생 메다르 카페였다. 아침으로 프랑스식 메뉴를 주문하고 마실 것으로는 커피를 시켰다. 이곳은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는 곳 가운데 스타벅스가 아닌 곳을 찾다가 알게 된 곳이다. 전날 소피 그리고 바르톨로메를 따라 이곳을 지나쳤던 곳이기도 하다. 생 메다르라는 카페의 이름은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생 메다르 성당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간단히 식사를 하며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일들을 봤다. (아직 인터넷을 마음껏 쓸 수가 없다) 9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왔을 때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10시를 넘기면서부터 사람들이 급격히 불어났다. 장을 볼 것도 있고 해서 10시를 조금 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몽주 약국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익히 알려진 곳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 미처 챙겨오지 않았거나 부족한 것들(바디워시와 샴푸..이런 것들을 왜 충분히 챙겨오지 않았을까)을 사기 위해 약국을 방문했다. 너무 종류가 다양해서 적당한 가격 안에서 나쁘지 않아 보이는 물건들을 골랐다. 그리고 계산을 하러 이동하는데 좀 전보다 더 큰 공간이 나와서 약국 규모가 매우 크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계산을 위해 서 있는 줄은 오전부터 꽤 길었고, 대기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항체검사 키트를 사러 온 사람도 여럿 있었다. 항체검사 키트를 사러 온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내 기분도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몇 가지 물건을 구입한 뒤 또 내가 향한 곳은 바로 앞 지하철역이다. 대중교통을 수월하게 이용하기 위해 나비고(Navigo; 대중교통 정액 카드)를 구입하려던 것. 수시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은 분명한데, 얼마나 자주 사용할지 모르고 벌써 1월 중순을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월말까지만 유효한 1개월권을 구입하기보다 일단 나비고 이지를 구입해서 꺄르네(정액권 10장)를 충전하기로 했다. 원래는 나비고 이지를 구입하면서 잔돈을 만들 생각으로 큰 금액의 지폐를 가지고 왔는데, 결론적으로 100유로권을 작은 돈으로 쪼개지는 못했다.
몽주 약국 바로 앞에는 조그마한 장이 선다. 작긴 해도 야채와 과일, 생선, 수공예품에 이르기까지 있을 만한 것은 다 있는 것 같다. 전날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몽주 약국 앞의 시장이 물건이 저렴하다고 한 것이 생각나서, 생선 가게에서 연어 한 토막을 샀다. 한 토막에 5,7 유로. 한국이랑 비교해서는 적당하거나 저렴한 수준인 것 같은데, 이곳 가격이 특히 저렴한 편인지는 다른 곳들을 다니면서 비교해봐야 할 것 같다. 매일 열리는 시장인지 일요일이어서 열린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차차 알아봐야 한다.
다행히 기숙사 근처, 그러니까 무프타흐 시장에는 제법 규모가 큰 franprix가 있는데, 여기서 파스타를 만들기 위한 토마토 페이스트도 하나 샀다. 여행을 하러 왔다면 그냥 음식을 사서 먹을 텐데, 하루라도 빨리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다. 어제는 닭가슴살로 알리올리오를 만들었고, 오늘은 연어로 아라비아타를 만들려고 한다. 원래는 크림 파스타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찾던 소스가 없어서 연어 아라비아타를 만들기로 했다. 괜찮은 조합이 될지 모르겠다.
# 내가 여기 사는 사람들의 뇌에 들어갔다 나온 적은 없지만, 이곳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온 학생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학생들이 많이 왕래하는 지역인데도 그렇다. 팬데믹 이후 아시아 관광객이 줄어서 그런 걸까. 출입구에서 학생증 태깅이 잘 안 되는 프랑스 학생을 도와주려고 내 학생증을 대신 태깅해주었는데 무척 당혹스러워 하는 기색이다. 고마움의 표시라도 해야 되겠다 싶었는지 다음 출입문을 나를 대신해 열어주는데, 어떻게 잡아 당겼길래 손잡이가 빠졌다. 당황하지 말라고 내가 빠져서 나뒹굴고 있는 손잡이를 문에 다시 꽂고 있는데, 이번에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대리석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나보다 키도 크고 총명할 어린 학생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내심 웃겼다.
# 오늘은 본격적인 개강에 앞서 이루어지는 프랑스어 수업의 두 번째 시간이자 마지막 시간이다. 오늘 역시 소피가 수업을 맡는다. 남프랑스에서 올라온 단아한 용모의 소피는 오늘 상의로 치파오 복장을 택했다. 나는 오늘 어제보다 훨씬 많이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 수업의 학생은 나를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이다. 독일에 온 다니엘은 철학(스피노자)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영국에서 온 피파는 불문학과 독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마르코는 법학(예의 나폴레옹 시대 법과 법철학)을 공부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 온 테오는 수학을 공부한다. 그리고 경제학을 공부하는 내가 있다.
사실 오늘은 참여에 대한 의욕이 있었던 만큼 어제보다는 귀가 트일까 기대했었다. 물론 사정이 어제보다는 나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수업의 후반부 주제가 프랑스의 교육 시스템으로 흘러가면서부터 갑자기 프랑스의 정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전문적인 용어도 너무 많이 나와서 대략적인 내용밖에는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가장 먼저 프랑스의 복잡한 학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등교육 단계에서 프랑스 교육은 일반대학과 그랑제꼴이 나뉘는데, 이탈리아 또한 비슷한 학제를 운영하고 있어서 테오와 마르코는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던 것 같다. 또 다니엘도 비슷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하는 소피의 친절하면서도 상세하고 어려운 프랑스 교육의 현재다.
요는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그랑제꼴 시스템이 과연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지 효율적인지 문제가 된다는 것. 프랑스에서는 인종에 기반한 통계 작성을 일체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지만, 현행 그랑제꼴 체제 안에서 프랑스 사회에서 주변부에 위치한 인종은 그랑제꼴 시스템에 편입되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그랑제꼴 무용론 또는 폐지론자(détracteur)들이 등장한다.
사실 프랑스는 대학교육을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공감대 아래 대학 학비를 정부에서 지원해 왔지만, 정부의 재정 부담이 늘어나고 여기에 팬데믹이 겹치면서 과연 학비를 받지 않는 대학 운영이 지속가능한가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있고, 실제로 비유럽권 학생들로부터 학비를 받는 등 점진적인 변화가 일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에마뉘엘 마크롱 역시 대학이 학비를 받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즉 영미권의 교육시스템을 어느 정도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대학을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국민적 인식이 자리잡게 된 데에는 60년대 학생운동이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사회 운동이 있기 전까지 프랑스 성인의 대학진학률은 3%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수치가 80%에 이른다. 교육에서 민주화가 이뤄졌다고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화된 교육 현장은 정치의 장이 되기도 했다. 소수를 위한 다양성을 강조하는 급진주의와 이슬라모포비아를 강조하는 극우주의 세력 간에 다툼의 장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교육 현장의 정치화는 한편으로는 교권의 개혁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정운영교과서를 채택하고자 했던 우리나라의 교육 현장과도 비슷한 모양새다.
어쨌든 그랑제꼴 회의론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랑제꼴 시스템은 아직까지 견고하다. 모두가 선망하는 학교인 동시에, 가진 자들의 자제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0명의 선별된 학생들은 모두 동질적인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 대목에서 이탈리아에서 온 테오와 마르코는 이탈리아의 경우에도 그랑제꼴과 같은 교육시스템을 운영하지만 100명 이하로 학교를 운영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그랑제꼴 만큼 엘리트주의로 이어지기에는 졸업생 수가 턱없이 적고 세가 약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처럼 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어느 나라나 사는 모양이 똑같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소피가 누차 강조하는 것은 선동적인 문구를 즐겨 쓰는 언론과 미디어를 경계하고, 중간 지대가 사라진 정치 현장에서 비판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아직까지 나의 활동반경은 무프타흐 시장과 게 뤼삭 거리 사이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다 오늘은 다시 한 번 마르셰 생제르망을 들렀는데, 얼마전 산 이더넷 어댑터를 환불받기 위해서였다. 인터넷 하나를 연결하는 데에도 복잡한 행정절차를 요구하는 이곳이다보니 잘 모르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챙겨온 공유기를 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환불 처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밤의 센 강변을 걸어보려다 그마저도 너무 멀리 가는 것 같아 생각을 접고 뤽상부르 공원 방면으로 돌아섰다. 이 시간에 뤽상부르 공원은 문을 닫기 때문에 공원의 테두리를 빙 돌아서 기숙사까지 산책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6구를 지나치게 되는데 내가 늘상 지나다니는 5구보다 좀 더 쾌적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밤이지만 여전히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강아지와 놀이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두고 온 우리집 강아지가 생각난다. 이곳에 와서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점도 있지만, 확연히 좋다고 생각하는 점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매우 활동적이고 사교적이다. (소피가 파리지앵은 사교적이지 않아서 문제라고 했지만..) 지하철을 타도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보는 사람들을 본 적은 많지 않고 대신 대화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게 좋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는데, 오늘 수업에서 받은 자극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에서일까 기분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다. 처음으로 이곳에 조금 더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돌파해야 할 프랑스의 복잡한 행정절차는 산적해 있고, 어디서부터 돌파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다 월요일은 돌아왔고 내일은 또 내일의 일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은 파리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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