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부터 은행엘 다녀왔다. 프랑스에서는 은행이 토요일에 여는 곳이 있다. 기숙사에서 가장 가까운 제네랄 소시에테를 가서 은행업무를 보기 위한 약속을 먼저 잡았다. 처음에는 15시로 잡았다가 나중에 14시로 조정했다. 시간을 24시간 단위로 표현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원래는 16시로 조정을 한다는 게 오후 4시를 먼저 떠올리고 14시로 조정한 것이다. 토요일 업무는 끝났을 것이고, 다음주에 다시 은행에 들러 시간을 조정해야 한다.
은행을 다녀온 다음에는 잠시 한국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렀다. 인터넷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와이파이를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랩탑을 이용해 학사일정과 관련해서 네 명의 교수에게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메일을 보냈다. 간단한 정보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보니, 여러 명에게 컨택해서 답장을 하나라도 받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오늘부터 주말이기 때문에 빠른 답장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카페 주인도 이곳에서는 모든 게 더디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일 처리가 다르기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한다. 이미 어제부터 기대를 내려놓은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방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제는 저녁도 먹지 않고 여섯시부터 곯아떨어져서 그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 일어났다. 전날 오후 일정으로는 학기가 시작되기에 앞서서 주말 이틀 동안 진행되는 프랑스어 수업이 있었다. 나는 두 개의 반 중에 B2-C1에 해당하는 반을 배정받아 소피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다른 반은 이보다 더 고급반으로 바르톨로메라는 사람이 수업을 진행한다.
수업은 크게 두 개의 영상물을 시청한 다음 문제를 풀고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첫 번째 영상은 프랑스의 arrondissement에 관한 내용이었고, 두 번째 영상은 프랭글리쉬에 관한 내용이었다. 지난 학기 꾸준히 프랑스어를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듣는 프랑스어가 채 절반이 되지 않는다. 소피는 남프랑스에서 온 매우 쾌활한 젊은 여성으로 수업이 지루하지 않도록 이런저런 농담을 섞어가면서 수업을 진행한다.
달팽이 모양을 닮은 파리의 행정구역이 어떤 식으로 유래되었는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예컨대 내가 살고 있는 5구는 학교들이 밀집해 있고 68운동의 중심지였던 학생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어서 집값과 생활비가 비싸고 학생들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것, 파리의 북동부 외곽은 산업화 시기에 형성된 지역으로 부르주아들이 밀집하기 시작한 파리의 서부와 달리 이민자와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제서야 샤를 드골에서 들어오는 길에 보았던 파리 북동부의 살풍경한 광경도 이해가 간다.
3시간 진행되는 수업의 나머지 3분의 1은 학교 일대를 산책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전날 캠퍼스 투어를 한 번 돌았지만, 좀 더 샅샅이 돌아다니는 느낌으로 학교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여기서부터는 바르톨로메가 담당하는 반이 합류하여 함께 이동하였다. 소피는 학교에 얽힌 재미 있는 이야기도 예의 유쾌한 농담을 섞어 전달한다. 학교의 각 구역에는 이곳의 학생들만 사용하는 표현들이 있다. 가령 학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로비는 aquarium, 줄여서 aqua라고 한다. 또 학교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작은 정원은 Cour Ernést라고 하는데, 에흐네스가 누구인고 하니 정원 한가운데 분수 안에 사는 물고기 이름이라고 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농인지 알 수 없다.
학교를 나와 무프타흐 시장을 중심으로 학교 생활을 풍성하게 할 만한 장소들을 소개해준다. 독립영화관, 서점, 크레페가게, 비스트로 등등등. 거리를 나오면서부터는 수업을 듣는 외국 학생들과 간단하게나마 말을 섞을 기회가 생겼다. 거의 대부분이 인문학, 그 가운데에서도 불문학을 공부하는 친구들이다. 간혹 수학, 법을 공부하는 친구도 있다. 많은 학생들이 유럽 출신(이탈리아, 헝가리, 잉글랜드 등 다양하다)으로 나보다 프랑스 문화나 프랑스어에 훨씬 능통한 듯하다. 또한 유럽 학교들끼리는 제휴가 잘 되어 있어서 교류가 활발한 것으로도 보인다. 동양인은 내가 유일하고 그나마 헝가리에서 온 친구가 아시아-유럽 언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하여 나와 약간의 접점을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