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먼 길을 돌아왔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아직도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번듯한 길인지 잘못된 길인지 모른다. 모든 걸 알고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새벽 비행기에서는 허공 아래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심연 속에서 이따금 모닥불처럼 도시의 불빛이 떠오를 뿐이다. 이름 모를 도시의 불씨는 어둠을 뚫고 지글지글 커졌다가 이내 힘없이 휘청이며 사그라든다. 종착지에 다다를 즈음 지평선 멀리 뜨거운 바다가 보였다. 저녁놀을 거꾸로 쳐벅아 놓은 듯, 해가 떠오르는 동녘으로 핏빛 실선이 비현실적일 만큼 강한 척력으로 창공을 밀어낸다.
서서히 어둠이 가실 즈음 주위에 복잡한 해안선이 보였다. 다시 보니 구름들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나는 도시의 조각난 윤곽들임을 깨닫는다. 경유지인 암스테르담에서 파리에 안착할 즈음, 도시는 흐릿한 안개에 갇혀 있었다. 출발 직전까지 잿빛 먼지에 갇혀 있던 서울의 풍경이 떠올랐다. 시간은 벌써 아침 여덟시를 넘긴지 한참이지만 한밤중인 것처럼 사위가 어둡다. 동지(冬至)가 지난지도 좀 되었으니, 파리의 위도가 서울보다 높다는 걸 실감한다.
광역열차를 타고 뤽상부르 역에 내린다. 샤를 드골 공항이 위치한 파리 외곽 동부의 풍경은 꽤나 음침하고 쓸쓸한 것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진료소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것을 빼면 파리 시내는 의외로 차분하다. 역에서 올라와 커다란 짐짝 두 개를 들고 게뤼삭 거리를 따라 목적지로 이동한다.
이윽고 짐을 푼 숙소에서는 한동한 수학(修學)할 공간이 바로 보인다. 하지만 회의(懷疑)를 빼고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내게 이곳의 풍경은 아직 흐리멍덩하게 보이는 것만 같다. 서울에서 파리에 이르는 동안 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무슨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모른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현실을 확인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러나 먼 길을 왔어도 확인해야 할 것은 있다. 알아야 할 것은 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되겠지만, 조금 더 멀리 보고 조금 더 멀리 손을 뻗어보고자 한다. 정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