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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의 일기: 불로뉴 숲Vᵉ arrondissement de Paris/Janvier 2022. 1. 29. 21:45
# 내가 한 학기 동안 공부하게 될 이곳 고등사범학교는 크게 두 개의 캠퍼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내가 살고 있기도 한 윔 가(rue d’Ulm)—정확한 발음은 윪 또는 윎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의 팡테옹 캠퍼스는 라탕지구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으며 철학, 문학, 자연과학 등 기초학문 수업이 주로 열린다. 일부 사회과학 수업—인지과학과 연계된 수업—이 열리기도 한다. 팡테옹 캠퍼스는 다시 네 개의 건물동으로 구성된다. 차례로 윔 가의 24, 29, 45, 46에 위치한다. 윔 가 45에 있는 건물이 에흐네스 정원이 위치한 조용한—동시에 매우 역동적이기도 한—중심적 건물이다.
14구에 위치한 주흐덩 캠퍼스는 2000년대 이후 들어 조성된 캠퍼스로, 법, 경제학 등 여러 사회과학 분과의 수업들이 열린다. 건물이 분산되어 있는 팡테옹 캠퍼스와는 달리 현대식의 단독 건물이 들어서 있다. 현대식 건물 맞은 편으로는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저층 기숙사가 자리하고 있어서, 팡테옹 캠퍼스와 마찬가지로 수업공간과 주거공간이 밀착되어 있다.
두 캠퍼스를 간단히 비교하자면, 주흐덩 캠퍼스가 위치한 14구의 포흐트 도흘레앙(Pte d’Orléans)의 번화가는 팡테옹 캠퍼스의 라탕 지구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중심을 이루는 상권은 아니기 때문에 다소 불편함이 따른다. 특히 학생식당이 잘 갖춰진 5구의 캠퍼스와 달리, 14구의 캠퍼스에는 작은 카페테리아 뿐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식사를 싸오거나 학교 밖으로 이동해야 한다. 내가 14구에서 수업이 끝나면 곧장 5구로 오려고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팡테옹 캠퍼스 인근에 뤽상부르 공원이 있다면 주흐덩 캠퍼스 인근에는 몽수히 공원이 있다. 둘 다 매우 근사하게 조성된 도심내 공원으로, 차이라면 뤽상부르 공원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화려한 뤽상부르 궁전이 위치해 있는 반면, 몽수히 공원은 거대한 건축물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쩐지 ’공원’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몽수히 공원이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데, 뤽상부르 공원은 관광객들의 출입이 많고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몽수히 공원에는 널따란 호수가 있는데 봄에 오면 참 좋겠다 싶다.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은 둘 모두 똑같다.
각인 효과(imprinting effect)인지도 모르겠지만, 맨 처음 도착한 곳이 윔 가이다보니 5구에 위치한 팡테옹 캠퍼스가 더 편하게 느껴진다. 기숙사를 배정 받을 때에도 14구보다는 여러 유명한 철학자와 과학자가 드나든 에흐네스 정원과 가까운 5구로 배정받기를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원래는 14구로 배정받았지만, 이후 학교측에서 5구의 공실로 옮겨 주었다. 의외로 기숙사에 공실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내가 주로 수업듣는 공간이 될 거라며 5구로 기숙사를 변경해주었는데, 사실 내 수업의 절반 이상이 주흐덩 캠퍼스에서 열린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곳의 뒤죽박죽인 행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각설하고 아직 이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학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들여다볼 때 학생들은 매우 활기가 넘친다. 도서관에 가면 심각한 표정으로 공부하는 학생들도 물론 많기는 하지만, 학생들은 혼자 공부하는 것 못지 않게 교우 관계나 교외 활동에 적지 않은 시간을 쏟는 것으로 보인다. 학교건물이 매우 작고 그 작은 공간에 모든 기능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작은 캠퍼스 안에서 공부와 동아리 활동, 숙식이 구분 없이 왕성하게 이뤄진다. 더 내밀한 영역으로 들어간다면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곳 교정에서 염세주의나 비관주의 같은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는다. 유럽의 높은 청년 실업률을 감안한다면—특히 프랑스는 높은 편이다—의외이기도 한데, 입학과 동시에 대체로 좋은 진로가 보장되어 있는 이곳 학교만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공교육이 잘 발달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도 사실은 소득수준과 지역에 따라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비율에 편차가 매우 크다.
이곳에 오면 특히 나 같은 교환학생은 다른 학교에서 온 교환학생을 접할 일이 많은데,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영국과 이탈리아, 그러니까 프랑스의 북쪽 또는 남쪽에서 온 학생들이다. 뒤이어서 프랑스의 동쪽(독일)에서 온 학생들도 적잖이 보이고, 의외로 서쪽(스페인)에서는 학생들보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듯하다. 또 아주 드물게는 러시아에서 온 학생도 보았고, 스페인어권으로 칠레에서 온 학생, 인도 학생도 보았다. 아시아 학생들은 극히 소수로 그 가운데에서도 중국인들이 절대다수를 이루고 한국인이나 일본인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즉, 이 학교는 지극히 유럽 중심적인 학교다. 미국식 영어를 쓰는 사람은 봤어도 학생 중에 미국인은 아직까지 본 적조차 없다. 유럽에서 온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익히는 데 매우 빠른 편으로, 문법보다는 회화와 자연스런 억양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이는 동아시아보다 대학간 교류체계가 잘 갖춰진 유럽 학생들이 갖는 큰 강점이다.
# 공용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동안 같은 층에 사는 디아(D)라는 독일인 친구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온 청년으로 어머니가 프랑스인이고 아버지는 튀니지에서 왔다고 했다. 그래서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안다. 레토르트 쌀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라면을 끓이는 동안 빵에 크림치즈를 바르며 게걸스럽게 식사하는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중간에 마리나라는 프랑스인 친구가 와서 통성명을 하느라 대화가 끊겼다. 사실 이 공용주방의 터줏대감 같은 D는—내 방이 공용주방 바로 앞인데 항상 그의 즐거운 목소리가 공용주방에서 쉴새없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미 마리나와도 아는 사이인지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알고보니 D는 파리에 도착하기는 나보다 이틀 늦게 도착했다.
D의 말에 따르면 독일어의 문법 구조가 프랑스어보다 좀 더 분명한 편이라고 한다. 본인이 독일에서 왔으니 팔이 안으로 굽겠지만 프랑스어 문법이 복잡한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 독일어는 관사만 해도 격이 몇 개인지 너무 많아 복잡하지만, 대신 프랑스어는 예외적인 문법이 의외로 많고 문어와 구어의 차이 또한 크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독일어를 눈 앞에 형체가 보이는 빵에 비유하고, 프랑스어를 뒤죽박죽이어서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맹탕 수프에 비유하는 그의 말이 나름 재치있다. 함부르크에서 태어나고 공부는 라이프치히에서 했다는 그는, 여기에서는 법과 경제를 함께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 자주 마주칠 것 같다.
# 여차저차 점심을 먹고 방에서 쉬다가 오후 느즈막이 불로뉴 숲에 가보기로 했다. 비가 내리는 건지 아닌지 도로는 한껏 물기를 머금고 있다. 버스를 타고 히볼리 가(R de Rivoli)로 이동한 다음 1호선을 타고 레 사블롱(Les Sablons) 역에서 내렸다. 역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불로뉴 숲을 찾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숲이 나온다. 샤를 드 골 가 저 멀리 라 데팡스의 마천루가 보인다.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은 파리 12구에 면한 방센느 숲(Bois de Vincennes)과 더불어서 파리의 왼쪽 허파를 맡고 있는 넓은 공원이다. 개인적으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비롯한 여러 프랑스 문학에서 무대가 되는 불로뉴 숲을 한번 와보고 싶었다. 지도로 봤을 때 넓은 공원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는데, 반드시 어디를 구경한다기보다는 쭉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몽수히 공원과 마찬가지로 복작복작대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참 좋다.
먼저 공원의 남쪽으로 쭉 걸어내려가다 보면 꽤 커다란 호수가 나온다. 가는 길에는 조깅하는 사람도 많이 보이고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도 많이 보인다. 가는 길 내내 내 앞으로 산책하는 리트리버 한 마리가 있었는데, 아예 호수에 풍덩 몸을 담갔다 나오고 물 위에 헤엄치는 오리들을 쫓아다니는데 우악스럽고 귀엽기도 하다. 호수 동쪽을 따라서 걸어오는 내내 앞에 리트리버와 그 주인을 앞에 두고 걸어오다가 호수가 끝나는 지점에서 호숫가를 벗어나 서쪽으로 향했다. 리트리버 일행은 셰익스피어 정원이 나타나는 지점에서 사라졌다.
다시 숲길을 쭉 걸어가다 보면 이내 셰익스피어 정원이 나온다. 이곳으로 향하는 길은 앞선 호수 주위보다 훨씬 적막하다. 이어서 정북 방향으로 쭉 걸어가다보면 마흐 생 쟘므라는 앞선 호수보다 아담한 호수가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16구 주민들보다는 파리에 인접한 눠이쉬흐센느(Neuilly-sur-Seinne)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아예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브헤뜨빌르 거리(Av. de Bretteville)로 빠져 나왔다. 파리 서부의 소득수준이 높다는 말대로 과연 이곳 주택가는 정돈되고 차분한 느낌이 있다. 파리에 비해 인적이 훨씬 줄어들어서 이곳이 전형적인 주택가임을 알 수 있었고 외관만 봐도 어지간한 소득이 아니어서야 이곳에 집을 구하기 어렵겠다 싶다. 조금 더 가다보면 브헤뜨빌르 거리는 아주 작은 광장을 지나는 지점에서부터 에흐네스트 들루아종 가(R de Ernest Deloison)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이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이윽고 오드센느(Hauts-de-Seine)가 강 건너로 마주보인다. 즉 크게 굴곡을 그리며 파리를 북동 방면으로 되감아 흘러나오는 센느 강을 다시 한 번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 길로 라 데팡스를 향해 쾨니히 장군 거리를 쭉 따라 걷는다.
# 라 데팡스(La Défense)는 1950년대 구상되기 시작한 신도심으로 이날의 방문은 전혀 예정에 없던 것이었지만 인도에서 타지마할을 갔을 때만큼 인상적이었다. 장기발전 계획으로 구상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50년대 중반에 공사에 착수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고 과학적이다. (런던의 시티 지역과 비교할 수 있을까?) 일단 차량이나 대중교통이 오가는 도로를 통째로 지하로 넣어서 광대한 지역이 도보 공간이다. 라 데팡스가 인상적이었던 건 단지 상하이나 베이징에서 볼 법한 마천루가 즐비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매우 쾌적하면서도 공간을 넓게 활용한 도시의 배치와 구성 때문이었다. 마음껏, 그야말로 원없이 건축물을 지어올렸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럼에도 균형이 잘 잡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곡선적인 이미지가 아닌 직선적이고 수평적인 형상으로 가득했던 것도 새로웠다. 아마 파리 안에서 오래된 건물들만 보다가 최신 건물들을 보고 일시적으로 받은 감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어서 또 한 번 놀랐던 건 신개선문, 즉 그랑다흐슈(Grande Arche) 일대의 쇼핑몰을 가득 채운 인파다. 어마어마한 소비욕구다. 파리도 그렇고 라 데팡스도 그렇고 어딜 가나 간판이나 메뉴마다 ‘Bio’라는 접두사가 즐비하지만, 과연 이렇게 소비를 해서야 얼마나 친환경에 가까워질지 의문이 들 정도. 신개선문 양측으로 정렬한 각양각색의 고층 빌딩들에는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가득 입주해 있는데, 파리 도심의 협소한 공간을 원치 않는 기업들이 죄다 라 데팡스로 몰린 게 아닐까 싶기까지 하다. 20세기 후반부터 이만큼 대규모 인프라를 지어올릴 때 프랑스 정부도 유력한 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거대한 건축물들을 누가 채우겠는가?) 프랑스 시내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문화가 주된 자본이구나, 또는 샤틀레-레 알의 포럼을 갔을 때에서야 여기도 붐비는 곳은 한국과 비슷하구나,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라 데팡스를 가면서 프랑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것 같다.
빵과 커피를 사서 그랑다르슈의 계단에 앉아 파리 도심을 바라본다. 먹구름이 낀 날씨지만 기온은 영상 10도로 온화하다. 멀리 직선상으로 보이는 파리 시내의 개선문을 보면서 도시 설계가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한다. 짧은 기간 머무르며 프랑스 사람들이 오래된 것을 고집하고 낡은 것도 관리하고 어떤 면에서는 고지식하다고까지 생각해오던 기존 사고의 틀이 조금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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