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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0일의 일기: 전시 두 편Vᵉ arrondissement de Paris/Janvier 2022. 1. 30. 22:01
# 며칠전 기숙사 엘리베이터의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엘리베이터 전광판에 층이 하나씩 틀리게 표기된다. 3층이 2층으로, RC(Rez-de-Chaussée)는 RB(Rez-de-Bas)로 표기되는 식이다. 처음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반층 올라가야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전광판 고장인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각층 복도마다 층 표기가 잘못됐다는 얘기다.
# 개를 키우는 입장에서 파리 시민들이 반려동물을 어떻게 키우는지 유심히 관찰하곤 한다. 파리 시내에 치우지 않은 배설물이 많더라는 얘기는 익히 들어서 놀랍지는 않지만, 그밖에 새로이 발견하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로 또 한 가지 놀라는 점은 목줄을 하지 않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인다는 점이다. 주인을 따르는 개더라도 다른 개를 만났을 때는 어떤 돌발상황이 생길지도 모르고, 아무리 차가 적다지만 달리는 차량의 위험도 있는데 지나다니다 보면 우려될 때가 있다. 어쨌거나 이곳의 기본방침은 대체로 자유방임(laissez faire)인 것 같다. 뤽상부르 공원에서는 아이들이 뛰노는 틈바구니에서 애들보다 큰 강아지와 프리스비를 하기도 하고, 불로뉴 숲에 갔을 때는 프렌치 불독이 주인의 휘파람 소리에 야생개처럼 잡목 사이를 쏜살같이 내달리고선 내 앞에서 사라지는데 사냥 연습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둘째, 어지간한 장소에는 개를 동반할 수 있는 듯하다. 카페는 물론 백화점, 은행, 식당 등에 별도 표기가 없어도 개를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보인다. 한 번은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일어서면 나랑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을 만큼 덩치가 산만한 강아지가 쌕쌕거리며 앉아 있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어느 경우든 크게 문제 제기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에티켓이 유지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반려동물이 사람과 살면서 공간 제약을 적게 받는 건 당연히 반길 만한 일이지만,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예기치 못한 손해나 상해가 발생하면 어떻게 풀어나가려나 궁금하기도 하다. 종종 성난 개들이 서로 사납게 짖는 소리도 들리기 때문이다. 하여간 신기한 풍경이다.
# 아침에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복습을 할까 싶어 수업자료를 챙겨오기도 했지만, 읽던 책조차도 집중이 되지 않아 얼마 안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정말 모처럼만에 햇살이 내리쬐는 날씨인데 그냥 늘어지고 싶은 날이기도 해서 못내 아쉽다. 일단은 점심을 만들어 먹을 궁리부터 했고, 그 전에 몽주약국으로 가서 폼클렌저부터 샀다. 이전에 한 번 들렀었는데도 너무 브랜드가 다양하고 상품 종류도 다양해서 고르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프랑스어 어휘들을 들여다보고 사전을 찾아가면서 어렵게 어렵게 구체적인 용도를 알아낸다. 미용에 대한 수요가 우리나라랑 조금 다른 건지 원하는 게 잘 보이지도 않고, 모두 프랑스산 제품들이어서 더욱 고르기가 까다롭다.
바로 옆으로 나와 몽주광장에서 연어 한 마리를 샀다. 저번에 사러 왔을 때와는 다른 주인 아저씨가 같은 위치에서 생선을 팔고 있다. 그러고 보니 가게들마다 위치가 조금씩 바뀐 것 같기도 하다. 저번보다 좀 더 큰 연어 토막을 골랐더니 가격도 조금 더 비싸게 받았다. 다음으로는 franprix에서 간단히 재료를 구했다. 오늘도 저번에 시도했던 연어 아라비아타 파스타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 일요일 점심은 공용식당에서 요리를 만드는 학생들로 분주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요일에는 적당한 가격에 식사를 해결할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 덕에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틀 수 있었다. 점심을 해결한 다음에는 유럽사진미술관(MEP; Maison Européene de la Photographie)에서 사진전을 보러 가보기로 했다. 학교 국제처에서 추천해 준 곳으로 근래에는 사무엘 푸소(Samuel Fusso)라는 작가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꽤 실망스러운 전시였다. 아프리카 작가의 작품을 본다는 의미는 물론 있었지만, 작가 자신의 자화상으로 가득해서 사진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때로는 누드, 때로는 사회운동가, 원주민 등등의 모티브로 사진을 촬영했는데, 그 모든 작품에서 작가 자신이 주인공이다. 작위적이기도 하고 난해했다. 흑인에 대한 차별, 아프리카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소요 등에 대해 메시지를 건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주제 자체는 의미가 있지만 너무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표현한게 아닌가 싶다.
사진전이 만족스럽지 않다보니 아쉬움이 남아서 피카소 미술관에 가보기로 했다. 유럽사진미술관에서는 몇 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는데 보주 광장을 둘러보기 위해 마레 지구 일대를 빙 둘러 걷느라 좀 더 시간이 걸렸다. 보주 광장은 가족 단위의 나들이로 뜨악할 만큼 붐볐다. 반면에 피카소 미술관은 우려했던 것만큼 붐비지 않았고, 나는 학생할인을 받아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학생 대우를 받으니 왠지 머쓱하다)
피카소 미술관은 최근 로댕 미술관과의 협업으로 로댕-피카소 합동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전시회장 입구에 발자크의 거대한 청동 입상이 서 있는데, 이미 ‘로댕’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부터 흥분됐다. (로댕 미술관도 꼭 가봐야겠다+_+) 피카소 박물관에 왔지만 시선을 끌었던 것도 대개 로댕의 작품들이었다. 그의 대리석 작품들도 볼 만하지만, 나는 그의 청동 작품들이 뭐든지간에 가장 마음에 든다. 거친 질감이 매끄러운 어느 순간에 질감으로 이어지고, 질감과 더불어 청동이 주는 고유의 묵직한 색감이 있다.
0~1층이 합동 전시회로 기획되어 있고, 2~3층은 시청각물을 활용한 피카소의 상설 전시회다. 피카소가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하기도 했지만, 색다른 작품들도 많이 보인다. 피카소는 예술가이기도 했지만 어떤 때 보면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것 같다. 회화, 조소, 판화를 하는 것도 모자라서 본인이 등장하는 영화나 영상물을 만들기도 했으니 말이다. 마지막 부인 재클린과의 캘리포니아 생활을 주제로 한 3층의 전시를 끝으로 미술관이 문을 닫는 오후 6시가 되어 밖을 나왔다.
# 일요일밤 마레 지구는 사람들로 붐볐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도 아닌 일요일 밤이다. 월요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테라스에 앉아 정신없이 떠들며 시간을 보낸다. 잠깐 얼마 전 읽었던 백년전쟁사에 관한 몇몇 대목들이 떠올랐다. 중세 영국이 볼 때 프랑스는 물자에 부족함이 없는 나라였다는 구절들이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는 영국에게 연전연패하고 약탈(chevauchée)을 당하면서도 희한하리만치 재정이 파탄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런 까닭에 섬나라 영국인들에게 프랑스는 일종의 '엘도라도'였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에 봐도 결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아닌데, 먹고 마시고 읽고 보고 즐길거리들 주위에 사람들이 가득하니 언뜻 봐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백화점 뒤 거리 일대에는 값나가는 고급 의류점, 향수가게, 화장품 가게들이 빽빽하다. 평소 프랑스인들이 일하는 방식을 보면 이렇게 각양각색의 물자를 만들어내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렇게 만들어낸 물자를 소비할 여력이 될 만큼 돈을 버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는데 말이다. 하지만 흔히 일을 안하는 것으로 프레이밍된 남유럽 국가—남유럽 중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만을 가보았다—들을 연상해 본다면, 프랑스의 거리나 상권의 분위기 또는 규모는 확실히 다르다.
이곳 사람들의 정신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누리는 물질은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다. 즉 물질적인 환경은 헤아리기 어려운 사상이나 관념들보다는 확실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일은 덜하면서도 여유는 더 가지고 사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심지어 평일 주말 없이 파업도 열심히 한다.) 달리 말하면, 프랑스 사람들 기준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휴식 없이 일을 한다고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어디까지나 기준점의 차이다.
조금 더 지내다 보면 이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일면이 눈에 들어오겠거니, 상념에 빠지며 밤의 센 강을 건너 5구로 접어든다. 그리고 모처럼만의 맑은 날씨 탓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창백한 색조를 띠는 팡테옹의 왼편을 마주보며 완만한 언덕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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