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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의 일기: 뻬흐 라셰즈Vᵉ arrondissement de Paris/Janvier 2022. 1. 26. 23:57
# 이곳에 도착한 뒤로 잠이 늘었다. 처음 며칠은 시차 적응 때문이었을 것이고, 2주가 지나가는 지금 느끼는 피로는 아마도 긴장감 때문인 것 같다. 수업에 들어갔을 때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을 때, 행정절차가 뭔가 잘못 되었구나, 하고 아차 하는 때가 있다. 이런 문제들은 꼭 잊지 않고 염두에 두고 있다가 다른 방식으로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다.
# 오전부터 점심까지는 카페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 책을 챙겨오길 잘했다 싶다.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고—여전히 만족스러운 식단이다—도서관에서 조금 더 책을 읽다가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 전에는 잠시 출력물을 인쇄하는 방법을 확인했다. 역시나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그리고 별로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인쇄물을 출력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어제 궁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사실 현지 학생들도 출력이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해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 친구들도 불편한 걸 알긴 아는구나 하는 생각.. 특히나 이곳에서는 텍스트를 읽을 일이 많은데, 문서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잘 안 되어 있는 점은 아쉽다.
# 늦은 오후에는 20구로 향했다. 뻬흐 라셰즈 묘지(Le cimetière du Père-Lachaise)로 가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라고도 불리는 곳. 한번쯤 가보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사실 왕릉이나 추모공원도 아닌 묘지를 가는 건 처음이어서 꺼림직했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이고 날씨도 이렇게 흐리니 풍경이 꽤나 음산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5구에서 가기에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고, 이런 날씨이기 때문에야말로 기숙사에 웅크리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버스를 이용해 20구로 이동했다. 중간에 있는 환승 정류소가 공사 중이어서 아우스터리츠 다리를 걸어서 건넜다. 생마르탱 운하가 인접한 구역으로 화물선이 보인다.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뻬흐 라셰즈 묘지가 문을 닫기 한 시간 전쯤에 도착했다. 딱 적당한 시간이다. 어딜 가도 사람으로 붐비는 파리 시내에 있다가, 이곳에 와서 느끼는 건 첫째 평온함이다. 조용하고 아늑하다. 뤽상부르 공원을 가도, 소르본 대학 앞을 가도, 샤틀레-레 알을 가도, 몽마르트를 가도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때로는 그런 풍경이 활력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너무 복작복작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길을 왼쪽으로 접어들어 시계 방향으로 묘지를 쭉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코로나 이전까지 이곳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았던 것은 이곳에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영면(永眠)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오노레 드 발자크와 외젠 들라크루아의 묘가 나온다. 이쪽으로 가는 길이 아기자기하고 고즈넉한데다, 겨울해가 짧을 때다 보니 주위가 어스름해져서 망자들의 공간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그리고 좀 전까지 골치를 썩혔던 문제들이 속(俗)의 공간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 같다. 왼쪽으로 길을 조금 더 파고들다 보면 이윽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묘가 나오는데, 앞의 두 묘에 비해서는 단출한 양식이다.
여기서 다시 동쪽으로 길을 틀어서 깊숙이 들어가면 오스카 와일드와 모딜리아니, 에디트 피아프, 앙리 살바도르의 묘가 차례로 나온다. 사실 오늘 들렀던 묘역의 주인공들 가운데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그의 묘를 찾는 건 말 그대로 '관광'이 되어버렸다. 반면 모딜리아니는 까마득히 잊고 지냈는데, 목이 긴 여인상들을 그렸던 그의 작품들이 새삼 머릿속에 그려졌다.
2시 방향에서 5시 방향으로 이동하면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묘가 나온다. 어떤 묘들은 찾기가 어려워서 비슷한 공간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을 마주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먼저 찾는 사람이 위치를 알려준다. 그리고 어쨌든 이곳은 알려진 관광지이지만, 관광객들만 오는 곳이 아니라 조문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유명인사의 묘소 중 둘러보지 못한 것이 더 많겠지만, 다섯 시 반이 되자 관리인들이 손에 든 종을 흔들며 퇴장 시간을 알리기 시작했다.
# 그 뒤로는 바스티유 광장을 거쳐 기숙사까지 걸어 왔다. 20구에서 5구까지의 거리인데도 30~40분이면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다. (뻬흐 라셰즈 묘지 정문을 나오면 행정구역상 곧바로 11구로 들어가므로 정확하게는 11구에서 5구로 이동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더 편하기는 하지만, 뻬흐 라셰즈 묘지를 나선 뒤 몸을 녹일 겸 카페에 들르고 싶어서 일대를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쿠바 컨셉으로 꾸민 어느 카페에서 몸을 녹였다가, 바스티유 광장과 생루이 섬을 거쳐 5구로 되돌아 왔다. 쉴리 다리를 건너면 왼쪽으로는 아랍연구소와 소르본 퀴리 캠퍼스의 거대한 건물이 나타나는데, 맞은 편 카페, 펍,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붐빈다. 다시 산 자들의 세계로 들어온 듯 거친 숨결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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