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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의 일기: 생말로(St Malo) 가는 길Vᵉ arrondissement de Paris/Février 2022. 2. 24. 00:58
# 관료주의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 ‘bureaucracy’는 ‘사무실’ 또는 ‘탁상’을 가리키는 프랑스어 ‘bureau’에서 유래한다. 실제 프랑스에서 지내다보면 그 이유를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모든 행정절차는 일종의 마비(麻痺) 상태에 빠져 있는 듯한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착란(錯亂) 상태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학기가 시작한 뒤에도 학생에게 정확한 시간표를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그러하다. 학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수차례 문의를 해도 정확한 답변을 ‘안’ 하고 관련 없는 답변만 자기 논리를 덧붙여 늘어놓는데 그럼에도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다른 담당자에게 떠넘기면서 꼭 마지막에 덧붙이는 말은 주저 없이(n’hésite pas~) 요청하라는 말인데, 이는 사실 모든 생물이 신진대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상투적인 표현이므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이들의 엽기적인 업무 행태와 무능함을 접하고 나면 하다 못해 난민캠프에서 일처리를 해도 이보다는 낫지 않을까 떠올린다.
그래서 프랑스 사회가 이 정도로 번듯하게 사는 것도 참 용하다 싶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관광업이 차지하는 비중(GPD의 7~9%)은 큰 편으로, 이탈리아(11~14%)나 스페인(11~13%)에 비해서 낮다고 할 수 있다. 세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나라가 프랑스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탈리아나 스페인보다 규모가 큰 프랑스 경제에서 관광업 비중이 낮다는 건 자체적으로 경쟁력 있는 산업이 있거나 다른 내수 시장이 잘 발달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참고로 '20년 기준으로 총 GDP는 우리나라가 1.6조 달러, 프랑스가 2.6조 달러고, 1인당 GDP는 우리나라가 31,500달러, 프랑스가 38,500달러 수준이다.) 도대체 이들은 몽파흐나스 역은 어떻게 지었으며, 퐁피두 센터는 어떻게 지어올렸을까, 이러한 일처리로.
사실 ‘행정’이라는 굴레만 벗어나면 프랑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좋다. 수업에서 만나는 교수들이 그러하고, 오며가며 만나는 프랑스 학생들이 그렇다. 수업도 만족스럽고, 파리 사람들의 도도함도 아직은 잘 모르겠고 오히려 상냥하다고 느낀다. 그러다가 주객이 전도된 이곳 행정에 대해 얘기하면 프랑스 학생들조차 잠시 민망해 할지언정 바로 인정한다. 예고 없이 멈춰선 행정시스템 때문에 주변의 사물을 두드리며 혼잣말(putain..)로 분통을 삭이는 프랑스 사람들을 여러번 보았다.
그렇다보니 이미 효율성이라는 잣대를 초월한 온갖 행정시스템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느낀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복지부동인 행정 시스템을 뜯어 고치겠다며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지만, 하루하루 아주 사소한 일로 행정업무를 마주하다보면 그러한 의지가 실현될 그 언젠가는 너무나도 요원해 보인다.
#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야지 마음만 먹고 어제 늦게까지 현지 드라마를 보다가 결국 늦잠을 잤다. 어쩐지 굳이 몽생미셸 근처로 숙소를 잡은 명분이 줄어드는 느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침에 버스 시간에 맞추려고 허둥대지 않아도 되니 몽생미셸 근처에 숙소를 구하기를 잘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숙소에서 제공되는 아침을 먹고 오전 열 시가 좀 안 되어서 짐을 맡기고 나왔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아는 체를 한다.
아침공기를 즐기면서 조용히 몽생미셸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는데,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이 아는 체를 하다보니 순간적으로 경계심이 발동했다. 소개하는 상대방은 브라질에서 왔다는 모니크라는 여성으로 30~40대 정도로 보였다. 관광지에서 말을 걸어놓고 돈을 요구하는 흔한 사기꾼일 거라고 판단을 그어 놓았지만, 마을은 인적 없이 평화로웠고 갈 길은 멀었다. 몽생미셸까지 들어가는 길을 같이 걸어가지 않겠냐는 상대방의 말에 그러자고 할 수밖에 없었다. 몽생미셸로 들어가는 길은 단 하나요, 상대가 걸어가겠다는데 어떤 식으로든지 마주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몰라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봤는데 거짓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브라질에서 온 여성이 혼자서 스코틀랜드와 토리노를 여행한 다음 프랑스에 왔다는 이야기는 거짓 같기도 하고 거짓이라기에는 너무 구체적이기도 하다. 원래는 약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시내로 나가는 버스 배차간격이 너무 길어서—하루에 여섯 대밖에 운행하지 않는다—아무래도 오전 시간에 몽생미셸에 먼저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었다.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못한 채 몽생미셸로 들어가는 바다 위 통행로를 함께 걸어갔다. 정오를 넘기기 전까지는 사람이 많지 않은 모양인지 길은 아주 한적하다. 몽생미셸의 풍경이 적당히 시계에 들어왔을 때 자신의 휴대폰을 건네면서 자신의 사진을 하나 높이 남겨달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점에서 그 사람에 대한 의심이 풀어졌던 것 같다. 사기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좋은 휴대폰을 쓰고 있었고, 포즈를 취하는 모습도 우리나라의 어린 학생들과 다르지 않았다.
쿠리치바(Curitiba)에서 왔다, 노동분야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아들이 하나 있다, 아들의 성, 중간이름, 이름까지 열거하는 이야기들을 서로 프랑스 7할 영어 3할로 주고 받는다. 여기서 다시 나는 7할을 영어로 이야기하고 모니크는 7할을 프랑스어로 이야기한다. 브라질에서 온 모니크는 포르투갈어가 모국어이기 때문에 자연히 프랑스어에도 능통할 수밖에 없다. 몇 차례나 몽생미셸에서 미사를 봐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나중에 생각을 해보건대 뭔가 힘든 개인적 사정이 있었던 게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다만 모니크는 한국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는 게 전무한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는 보통 나를 중국인 아니면 일본인으로 보기 때문에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한국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 같았다. 사는 도시를 묻길래 서울이라고 말하면, 서울도 남한 서울이 있고 북한 서울이 있냐고 묻는 것이었다. 쿠리치바가 친환경 도시사업으로 유명하다고 먼저 추켜세워 주었던 나로서는 내심 당황스러웠다. 파리를 보면 서울보다도 글로벌한 도시지만, 프랑스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시아에 대한 그들의 일천한 지식을 접하고 나면 우리나라가 먼 나라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떤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몽생미셸에 들어선 뒤에도 한동안 같이 움직이다가, 모니크 쪽에서 아침을 먹지 않았다며 미사 시간이 되기 전까지 카페에 가려 한다고,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어 기뻤다고 얘기를 꺼냈으니, 결과적으로 수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구름이 가득한 노르망디 해안의 고요함은 놓쳤지만, 이야기 동무가 있어서 그런대로 경쾌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나부터가 지나가는 여행객이고, 어쩌다가 또 다른 지나가는 여행객을 만나다보면 짧은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 모니크와도 거듭 이야기를 나눴지만 몽생미셸은 대단히 오래된 건축물이다. 오베흐 주교(Saint-Aubert, évêque d'Avranches)가 성인 생미셸로부터 ‘여기, 높이 지어라’라는 계시를 받은 게 708년, 리샤흐 공작 1세(duc Richard 1er de Normandie)가 크게 세 개 층으로 구성된 대수도원을 짓기 시작한 게 966년의 일이다. 그 시점이면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4세기로부터 시간이 흘렀다고는 해도, 프랑스 북쪽 해안에 이런 종교 건축물이 지어질 정도로 교세 확장이 빨랐던 건가 하며 느끼는 놀라움 하나와, 섬에 이 돌들을 어떻게 옮겨 왔을까 하는 놀라움 하나가 더해진다. 보면 볼 수록 신기해서 자재는 둘째 치더라도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많고 인력이 남아돌면 바다 위에 이런 건물을 지었을까 싶기도 하다. 집단적 믿음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대수도원(Abbey)으로 이동한 다음부터는 서쪽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름 모를 섬 하나가 계속해서 내 시선을 잡아끈다. 쿠에농 강은 썰물이 빠지면서 이미 강의 형체를 잃은지 오래되었고, 갯벌과 경계가 불분명한 초원 위에서는 양들이 흰돌처럼 앉아 있다. 그 뒤로는 아직까지 앙상한 선으로만 남은 겨울 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먹구름은 낮게 깔려서 대지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기도, 깃털처럼 가볍게 모습만 바꾸는 것 같기도 하다.
몽생미셸의 아이러니라면 혁명 이후로 이곳 또한 수감소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이 가져왔던 여파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던 걸까. 그 증거는 대수도원에 위치한 물레방아로 수감자들을 먹고 재우기 위한 물자를 충당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몽생미셸 자체는 완전한 요새지만,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큰 지역이고 마침 갯벌이 바닥을 다 드러낸 시간대였기 때문에 요새화된 섬은 육지와 거의 맞닿은 상태였다.
대수도원을 빠져온 뒤 점심을 먹기 위해 마을을 잠시 헤맸다. 나는 오 플르랑(Au Pelerin)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라 메흐 풀라흐(La Mère Poulard)는 헤밍웨이와 입생로랑이 찾았다는 오므라이스 가게로, 그러한 내러티브를 듣고 귀가 매우 솔깃해졌으나 가격도 가격이고 현지인들에게조차 평점이 너무 나빠서 가지는 않았다. 몽생미셸 안의 레스토랑들은 대체로 평점이 낮은 편인데 라 메흐 풀라흐는 그 중에서도 눈에 띄게 낮았다. 그래도 오는 길에 가게를 보니 거의 만석인 것으로 보아 가게가 그렇게 운영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사실 몽생미셸 일대에는 편의시설이 거의 없어서 관광객들에게 선택지가 거의 없다. 상점이나 숙박시설이 잡다하게 들어서지 않아서 쾌적하기는 하지만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교통도 그렇고 불편하기는 하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찾았는데 다시 한 번 모니크와 마주쳤다. 다행히 약국에서 차량을 보내주어서 따로 차비를 내고 약을 지어왔다고 했다. 그녀는 같은 장소에서 하루 더 묵기 때문에, 길을 떠나는 나는 이제는 정말 헤어짐의 인사를 하고 밖을 나섰다.
# 아침 열 시쯤 몽생미셸에 들어가서 숙소에 돌아왔을 때 오후 세 시가 되어 있었으니 몽생미셸은 충분히 돌아본 것 같았다. 다만 렌느로 가는 버스가 오후 여섯 시 넘어서 있고, 체크아웃 시간은 이미 넘겼다. 시간을 보낼 카페가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하는 고민이 남았다. 마침 수요일과 일요일에만 운행하는 생말로 행 버스가 오후 3시 45분에 있었다. (프랑스어로는 항상 15시 45분이라고 표기돼서 무척 헷갈린다. 가끔 13시를 오후 3시로 생각하는 십진법 계산을 하기도 한다.) 큰 고민 없이 생말로로 가기로 했다. 생말로와 렌느 사이에는 거리 차이가 크지도 않고, 생말로로 가든 렌느로 가든 파리로 가는 열차는 있다.
파리를 출발할 때까지 몽생미셸에 대한 정보도 자세히 찾아보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렌느든 생말로든 도시 정보를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기숙사를 나오면서 휴대폰에 사진으로 담아둔 론리플래닛 정보가 전부였다. 때문에 나는 생말로와 렌느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생말로는 렌느보다는 작은 도시였다. (어째서 나는 렌느보다 생말로라는 지명이 더 익숙할까?) 왜냐하면 파리로 가는 열차편이 렌느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생말로는 인구가 20만 명인 렌느의 5분의 1 크기에 불과하다. SNCF의 시간표를 들여다보면서 잠시 동안 고민하다가, 저녁 8시 반 몽파르나스행 열차를 예매했다. 파리로 들어가는 마지막 열차인데 가격이 훨씬 저렴해서, 아낀 비용으로 아예 저녁을 먹고 파리로 이동하고 생말로도 잠시 둘러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제까지 대학 본부와 단과대와 행정절차가 전혀 맞지 않아 분란이 일어났던 일이 머릿속에 비집고 들어오면서, 갑자기 심란하고 갑갑해진 마음으로 역에서 성벽까지 걸어갔다. 몽생미셸의 하늘이나 생말로의 하늘이나, 그러니까 노르망디의 하늘이나 브르타뉴의 하늘이나 차이는 없다. 이 시간이 아침인지 오후인지도 알 수 없게 시종일관 칙칙하고 무표정한 얼굴이다.
생말로에서 어떤 풍경을 기대해야 할지 몰라서, 성벽 안에 이른 후에는 사람들을 따라 그헝베(Grand Bé) 섬 안으로 들어갔다. 바닷물이 빠져서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헝베 섬을 둘러싸고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크고 작은 섬과 암초들이 에워싸고 있다. 어떤 섬에는 대저택 같은 건물이, 어떤 섬에는 등대가 들어서 있다. 전반적으로 조용한 느낌이고 여름에 오면 퍽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이스라엘에 가서 여행했던 악코(Akko)의 성안이 떠오르기도 했다. 똑같이 곶을 따라 형성된 성이다. 종종 보이는 대포들은 장난감 같기도 한데, 그 옛날 해안을 덮치는 적선을 향해 조준하고 장전하는 대포의 형상을 떠올려 보았다. 오늘날의 전쟁은 그렇지가 않아서 몇 초의 조작으로 수십만 명을 사라지게 할 수 가 있으니, 사람의 가치가 예전보다 높아진 건지 낮아진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 자연히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 짧은 생말로 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다름아닌 버스였다. 버스시스템이 파리와 조금 달라서 이곳은 종이로 된 승차권을 쓴다. 허술하게 생겨서 처음에는 일회용 승차권인 줄 알았는데, 종이로 된 표를 ‘태깅’하면 기계가 인식을 한다. 사실 플라스틱 카드는 수명을 다하면 처치곤란한 쓰레기다. 그래서 파리에서는 개찰구에 한 번 투입하고 버려지는 종이 승차권도 문제가 된다. 생말로처럼 크지 않은 도시에서 종이로 된 승차권으로 얼마나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럼에도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종이 승차권을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정말 좋은 것 같다. 또 생말로같은 작은 도시에서 이러한 정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을 보며, 프랑스 행정의 미스테리가 한층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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