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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의 일기: 호흡(呼吸)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17. 16:39
# 살면서 이렇게 긴장되는 발표는 처음이다. 오늘 발표가 뭐길래 거의 2주 전부터 초조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살면서 중요한 면접이나 발표를 한두 번 한 게 아니건만 오늘 발표는 정말 떨렸다. 발표를 하러 교실 앞으로 나가면서 올림픽 무대에 선 선수가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호흡을 고르고 발표를 마치기는 마쳤는데 잘된 발푠지 아닌지 감이 오지 않았다. 발표가 끝나고 질문을 받다보니 빠뜨리고 설명한 부분도 있었고,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발표였다. (발표의 주제는 ‘인구 규모가 문화적 변동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조교와도 이야기를 해보고 발표 이후 내게 질문을 했던 수강생과도 얘기를 해보았는데 부족한 점이 많았다는 게 더욱 명확해졌다. 특히 논리적인 연결이나 명확한 설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사실 영어나 프랑스어로 작문과제를 할 때에도 몇 번인가 받았던 피드백이다. 어릴 때부터 그런 화법에 훈련이 되어 있는 이곳 학생들과 달리, 내게는 그런 식의 화법 구사가 대단히 어렵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한다. 구체적인 적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곳 사람들과 달리,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 이상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어느 정도 빈틈을 열어두는 동양적 화법—거칠게 말하면 선문답식 화법—을 영어로 구사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발표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뿐만 아니라 도대체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나 하는 막막함과 두려움이 컸었는데, 마치 한 주 같이 길었던 수업 세 시간을 마치고 기숙사로 되돌아왔다.
# 오늘 저녁에 예정된 프랑스어 수업은 이미 며칠 전부터 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일단 청강으로 듣는 수업인데다, 이번 주 두 차례가 발표가 끝나면 녹초가 되어 있을 게 분명해서 오늘 저녁 수업을 소화할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수업이 끝난 뒤 곧장 기숙사에 돌아와 완전히 뻗어버렸다. 발표에서 부족했던 점들이 머리를 내내 어지럽혀서 결국 저녁 시간에는 밥도 먹지 않은 채 오르세 미술관으로 향했다. 생각의 사슬을 한 차례 끊고 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 목요일 오르세 미술관은 야간 입장을 받는데 이 시간대는 사람이 많지 않은 편이다. 지난 번 인상주의 작품들을 보다 말고 나왔던 기억이 있지만, 굳이 이전에 본 전시를 이어서 보기 위해 인상주의 전시실로 가지 않고 일단은 발이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오후 수업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순서에 맞춰 꼼꼼히 감상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오늘 주로 둘러본 공간은 대체로 -1, 0층의 작품들인데, 그마저도 통로 왼편에 위치한 사실주의 작품들을 보는 데 그쳤다. 퐁피두 센터와 달리 오르세 미술관은 전시실이 조금 복잡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오늘 얼마나 둘러본 건지 감이 잘 오지는 않지만, 아무리 넉넉잡아도 미술관의 3분의 1 정도 본 게 아닌가 싶다.
사실주의 전시실 초입에 밀레와 쿠르베의 작품을 둘러볼 때부터, 오르세 미술관을 다 둘러보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인터넷에 누군가가 오르세 미술관을 둘러보는 데 일반적으로 세 시간 정도 걸린다는 말도 있었고, L이 오르세 미술관은 퐁피두 센터보다 작다고 했던 말도 있어서 야간 개장 때 다 둘러볼 수 있으려나 잠시 계산했었는데, 결국은 세 시간 동안 오르세 미술관에 머무르면서 전체 전세의 3분의 1도 보지 못했다. 사람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 몇 번 더 오르세 미술관을 다시 올 생각이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많다.
오늘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단연 쿠르베의 작품들이다. 인물화들도 좋지만 풍경화가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L이 가장 좋아한다고 하는 피에르 보나흐의 작품도 우연히 발견했는데, 작품을 직접 마주하고 보니 우키요에(浮世絵)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은 인상을 받았다.
# 돌아오는 길은 적당한 버스를 찾지 못하고 그냥 팡테옹까지 걸어서 왔다. 센 강을 따라서 걷다가 마자린 가(R Mazarine), 무슈 르 프헝스 가(R Monsieur le Prince), 게뤼삭 가(R Gay-Lussac)를 따라 기숙사까지 30분 여를 걸어왔다. 사실 머리가 멍해서 오르세 미술관에 머물렀던 세 시간과 센 강에서 팡테옹까지 걸어오던 삼십 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목요일 밤 오데옹 일대는 레스토랑과 펍마다 인파로 넘쳐났고, 이들이 남긴 세기말적 밤풍경이 뇌리에 와서 조용히 그러나 깊숙이 흔적을 남겼다.
# 파리에 있는 박물관을 다니다보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많은 작품을 만들어야 했을까, 왜 이렇게까지 공들여서 만들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작품 하나하나를 담은 액자들까지도 장식이 다채롭게 들어가 있어서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간 느낌이 난다. 게다가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유행한 초대형 작품들—매우 큰 캔버스 위에 그린 그림들—과 대리석으로 된 온갖 형상의 조각들을 보고 있자면 도대체 이 많은 재료들을 어디서 공수해 왔나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네와 모네의 인물화들 가운데 내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사로잡는 작품이 어떤 건가 골라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하지만 말이다.
여하간 이렇게 사람의 손길이 닿은 수많은 작품을 보고 있다보면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자산이라는 게 실제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할까. 물론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자산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관념적으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구체화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파리의 박물관이나 거리를 다니다보면 꼭 숫자로 나타낼 수 없더라도 일단 가지고 있으면 아주 든든한 자산이라는 게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자산들은 단순히 사고 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자산의 몇몇 부분들을 잘 엮어서 시장에 내놓아 브랜드를 내걸고 팔기도 하지만, 사실 그 브랜드의 이면에는 값어치는 물론이거니와 형체와 규모조차 파악할 수 없는 훨씬 큰 무언가가 있다. 누군가는 그걸 예술이라 부르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걸 문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전통이라 부르기도 하고 소프트파워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정의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런 자산은 사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돈을 모은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내 손에 넣고 싶다는 소비자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금을 지불하면서까지 이들이 할당해주는 아이덴티티에 함께 하고 싶어한다. 더욱 흥미로운 건 생산자 관점에서 이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대단히 근면성실하거나 초인적인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러한 자산을 일정한 기간 안에 창출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라는 점이다.
남들은 떠올리지 못한 기상천외한 발상, 다양성에 대한 강력한 흡수력, 기벽(奇癖)에 가까운 수집벽, 남의 시선 따위 걷어차버리는 개성 욕구, 자신만의 심미안을 구축하려는 고상한 취미 등이 합쳐진 사회적 분위기와 이를 너그러이 그렇지만 동시에 분주히 받아들이는 구성원들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인 것 같다. 값을 매기기가 곤란할 뿐이지—과연 LVMH의 시가총액이 이들 자산을 얼마나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이러한 유형의 자산도 분명히 축적되기는 할 텐데, 이 나라 사람들은 이를 일찍부터 알고 영리하게 쓰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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