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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의 일기: 불사조(le phénix)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17. 04:56
# 오후 게임이론의 팀발표가 있었다. 좌충우돌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일단락됐다. 발표과제가 연달아 있는 상황에서 팀과제는 개인적으로 후순위에 두고 있기는 했지만, ‘팀’ 과제라는 특성상 구성원들이 한마음(!!)으로 같은 과제를 수행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발표를 앞둔 마지막날까지도 발표자료를 정리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프랑스에 온 뒤, 코로나가 절정을 달할 때도 아픈 적이 없었는데 요새 목 통증이 크게 찾아와서 오후에 있던 발표가 끝날 때까지 더욱 힘을 쏟아야 했다.
스트레칭을 충분히 하지 않고 오래 앉아 있다보면 간혹 목 통증이 조금씩 올라올 때가 있는데, 통증을 감지할 때는 이미 늦어서 목 통증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는 이미 심한 두통을 느낄 정도로 목과 등근육에 통증이 찾아온다.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는 규칙적으로 수영을 했었는데 프랑스에 와서는 그런 운동들을 하기 어려워졌다. 가만히 있는 게 능사가 아니다보니 몸을 움직일 겸 수업이 끝난 뒤에는 3구로 30분여 걸어서 이동했다. L이 알려준 서점도 찾을 겸.
# ‘불사조(le phénix)’라는 이름의 이 서점은 3구의 번화가에 자리하고 있다. 외관과는 달리 제법 큰 규모를 갖추고 있어서, -1, 0, 1층의 세 개 층을 사용하고 있다. ‘아시아 서적만을 취급한다’는 독특한 컨셉을 가지고 있는 서점인데, 입구를 들어설 때 보이는 빨간 색 간판을 보면 짐작할 수 있지만 중국과 관련된 서적이 압도적으로 많다. -1, 0층을 둘러볼 때까지도 간체자로 된 중국 관련 서적들이 많아서 괜히 찾아왔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렇다고 막상 서점을 찾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_=)
얼마전 L에게 생각보다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프랑스에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더니 추천해준 서점이 이곳이었다. 한 층 위 1층으로 올라가면 비로소 중국이 아닌 아시아 국가와 관련된 서적들이 나타나는데, 과연 L의 말대로 일본서적 코너와 견주어볼 만큼 한국 서적 코너가 비중있게 마련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는 프랑스와 역사적으로 긴밀하게 관련이 있던 베트남 서적 코너도 크게 보이고, 위구르, 티베트 지역에 관한 책들도 보여서 종류의 다채로움이 느껴진다.
지베흐 조제프를 갔을 때도 느낀 거지만, 한국 서적 코너를 보고 있다보면 막상 내가 잘 모르는 한국 소설들이 번역되어 소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작가나 작품의 이름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 한국 서점가에서는 매대에서 눈에 띠지 않던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어서 오히려 내가 역으로 소개를 받는 느낌이다. 무의식중에 한국 교과서에도 등장할 만한 소설들이 번역되어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은데, 옆 코너 일본 서적을 보면 상황이 크게 다른 것 같지 않기도 하고 헷갈린다.
여기서 나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matin calme)’라는 가벼운 일러스트집을 하나 샀다. 한국인과 콜라보한 작품도 아니고 프랑스 사람이 한국에 체류하면서 직접 그린 일러스트들이 담겨 있다. 그녀가 프랑스를 떠날 때 아시아 국가 중에 가장 먼저 선택한 곳이 한국이라는 것도 어쩐지 좋았다. 다만, 왜 우리나라를 언급할 때 항상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표현이 따라 붙는 건지는 정말 궁금하다. 나는 이 표현이 그리 와닿지도 않고 상투적인 관용 표현인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국’에 대해 떠오르는 다른 익숙한 표현이 없다보니 구한말로부터 한 세기를 훨씬 넘긴 지금까지도 반복적으로 이런 캐치프레이즈가 통하는 것 같다.
다행스러운 건 삽화들은 한국을 아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고 내가 느끼기에도 딱 핵심이 되는 내용과 디테일들을 오류 없이 잘 담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작은 공원에 설치된 한국에서나 보일 법한 철제 운동기구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러스트가 있다. 프랑스어와 섞여 쓰인 한국어 표현과 한글도 아주 정확하다. 또 작가가 서울에만 체류한 게 아니라 강원도, 충청도 등 한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겪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담겨 있어서, 대충 만든 책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다.
# 어제 한인 식자재점에서 사온 식품들을 소진하기 위해 공용식당에서 이것저것 전자레인지에 돌리다가, 앨리스(A)와 마주쳐 뜬금없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매번 인사만 하던 사이였고 긴 얘기를 나눈 적은 없었는데, 학교 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가 파리 근교의 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학교 안에서 수업 네 개를 들으면서 동시에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근교에 있는 프랑스 학교에서 12시간씩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나는 그 말을 듣고 반성부터 했다. 나는 여기 행정이 복잡하다는 둥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데, 이 어린 친구는 교외 활동까지 겸하고 있다니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었던 걸까.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 고학년들을 가르치고 있다는데, 난민들도 많단다. 정말이냐, 어디서 온 난민이냐고 물으니, 코트디부아르나 알제리처럼 프랑스와 관련이 있는 나라에서부터 티베트인까지 있다고. 그러면서 애들이 너무 예쁘다고 하는데, 곁가지로 종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애들이 하교 때 얼굴에 스카프를 두르는 이야기를 하며 울상을 지어 보이길래(정말이지 나는 평소 이곳 학생들이 드러내는 감정표현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못할 것 같다.. 게다가 아무래도 여학생이어서 더 감정표현이 풍부한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가 갑자기 유럽의 이민자 문제로 샜다.
유럽의 다문화주의나 문화적 충돌에 대해서 늘 관심이 있었다보니 유럽 각국의 이민자 사회와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유럽 내 반이민자 분위기에 대해서 물었는데, 영국도 프랑스 못지 않게 이민자에 대해서 정부가 굉장히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영국은 북아일랜드와의 충돌도 문제가 되어 왔기 때문에 이민자들이 일으키는 소요나 테러 행위에 늘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다만 프랑스와 영국의 차이점은 프랑스 사람들이 유달리 국수주의적인데다 일단 논쟁이 생기거나 불만이라는 도화선에 불이 붙으면 영국과 다르게 금방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는 점.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영국인들의 관점에서 나온 의견이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가 표방하는 세속주의(laïcité)도 결국은 다른 형태의 신앙이 아니겠냐며 서로에게 보내는 공감.
그렇게 종교와 이민자 문제에 대해 얘기하다보니, 갑자기 미신 얘기로 이야기가 샜다. 한국은 유럽에 비하면 구성원이 훨씬 동질적이고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인구가 많다고 했다가(아시아 국가 중에는 기독교도의 비중이 높다는 각론도 덧붙였는데 신기하게도 그녀도 한국 교회에 대해서 꽤 알고 있었다), 미신도 없냐는 A의 말에 이야기의 방향이 급작스럽게 바뀐 것이다. 문지방을 넘을 때 신발의 굽 높이를 어떻게 둬야 한다든지,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소금을 뿌린다든지—이 부분에서는 비슷한 한국의 미신을 이야기해주었다—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자레인지에 돌린 음식들도 다 식어갈 즈음 인사를 나누고 각자 방으로 되돌아갔다.
#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 보면 학업과 사회활동을 병행하는 A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에서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영어에 대한 수요는 어딜 가나 있고 (그리고 크고), 그 국수주의적이라는 프랑스인들조차 한 수 접고 자국에서 영어로 된 수업을 대폭 개설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말’의 힘이라는 게 실로 대단한 것이고, 일본인들이 식민지배를 할 때 종국에는 왜 우리말을 빼앗으려고 했는지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많은 학문 영역에서 영어가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쩔쩔매면서도 영어로 말을 한다. 말이 힘인 것이고 힘이 말인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그녀의 열정을 보며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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