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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의 일기: 신발은 발에 맞아야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1. 00:29
# 시내에 숙소를 잡으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는 소음이었다.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자정이 넘도록 왁자한 소리가 방까지 전해졌다. 그러다 새벽 두 시 반에는 아예 잠을 깼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젊은이들의 함성이 들렸기 때문이다. 종종 젊은 청년들이 야외에서 무리를 이뤄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번엔 좀 차원이 달랐다. 젊은 남성이 선창을 하면, 다른 젊은이들이 후렴을 길게 붙이는 방식으로 새벽 두 시 반에 온 동네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노래를 불렀다. 팡테옹 앞에서도, 툴루즈의 광장에서도, 심지어 기숙사 안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젊은 혈기를 발산하는 모습을 보기는 했었지만, 새벽의 이번 소동은 잠을 달아날 만큼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죽음을 앞둔 늑대 무리가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것 같았다고 하면 과장일까. 하여간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참 난해하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불 앞에서 춤을 추는 조르바를 묘사할 때 아마 이런 광경으로부터 연상한 게 아닐까 싶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다. 5분에서 10분 정도 클라이맥스를 향하던 광적인 포효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소음을 걱정하지 않고 깊이 잠에 들 수 있었다.
# 랭스라는 곳에 대해서는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이뤄지던 도시라는 막연한 역사적 사실만 알고 있었다. 때문에 대관식이 이뤄지던 성당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미 툴루즈와 보르도에 머물며 대성당을 수도 없이 본 나로서는 대성당을 더 본다한들 감흥은 없을 것 같았다. 때문에 전날 에페흐네에서 랭스까지 여정이 좀 더 일찍 끝났다면 랭스 시내를 둘러보지 않고 곧장 파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새로운 한 주를 기다리며 일요일 하루 정도는 온전히 파리에 있는 게 심리적으로도 편할 것이므로.
어쨌든 하루를 랭스에 1박을 묵게 된 상황에서 아침 느즈막히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한 번 맥도날드를 찾아 이번에는 맥카페 메뉴로 브런치를 먹었다. 어제처럼 환상적인 느낌은 없지만, 어쨌든 일요일 아침에 문을 연 몇 안 되는 카페다. (사실 랭스에 와서 프랑스의 맥도날드를 처음 와봤다.) 커피를 마시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오늘 일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해 보았다. 맥도날드를 나선 다음에 랭스 대성당을 일단 가보았지만, ‘일요일 아침’이다보니 한창 미사가 시작되는 참이어서 성당 내부를 구경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겅베타 가를 따라 25분여 남쪽으로 내려가 생-레미 성당(Basilisque Saint-Remi)—발음은 ‘상-흐미’가 더 가깝지만 ‘항스(Reims)’도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랭스’로 알려져 있는 등 프랑스어는 한국어 표기가 까다로워서 일단 ‘생-레미’로 정리한다—을 둘러보았다.
여행을 하다보면 막상 유명 관광지보다 그렇지 않은 곳에서 더 몰입해서 시간을 보낼 때가 있는데, 생 레미 성당이 그러했다. 생 레미 성당은 랭스라는 도시의 역사와 동시에 시작할 만큼 오래된 성당이지만(전쟁으로 심하게 훼손된 적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천 년이나 된 오래된 바실리카다), 랭스 시내로부터 꽤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지 찾지는 않는 곳이다. 랭스 대성당에 비해서 규모는 작고 양식 면에서도 로마네스크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생 레미 성당을 천천히 둘러본 다음 성당 뒷편 공원을 거닐다가 다시 시내로 돌아올 때에는 바흐바트흐 가(R du Barbâtre)를 따라서 걸어왔다.
# 점심으로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은 뒤 미리 사둔 표를 갖고 팔레 뒤 토(Palais du Tau)를 향했다. 팔레 뒤 토는 주교의 궁전 역할을 했던 곳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가장 눈여겨볼 만한 건 태피스트리 작품들로, 프랑스답게 박물관에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유물이 굉장히 많다. 안타깝게도 태피스트리가 한가득 전시되어 있어도 묘사된 일화 가운데 이해할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분이다. 반면 중세 성물들은 딱히 배경지식이 없이 관람하더라도 진기한 볼거리다. 갖가지 색깔로 된 보석이 박혀 있고, 세밀한 금세공이 되어 있어서 보물창고를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밀한 공예품들을 보면서 어쩐지 부여에서 보았던 금동대향로가 떠올랐다.
파리로 돌아가는 열차표를 예매해 놓은 뒤, 아침에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바로 옆 대성당을 다시 찾았다. 이제 미사는 모두 끝나서 관람객들에게 일반 개방이 이뤄지고 있었다. 성당 내부의 조소(彫塑)는 생 레미 성당이 더 낫지만, 랭스 대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가 볼 만하다. 이미 크노벨(Imi Knoebel)이라는 독일 작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어 있는데,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경에서 멀지 않은 랭스와 랭스 대성당이 독일군에게 큰 폭격을 입었던 걸 생각하면 스테인드글라스를 독일작가가 꾸몄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랭스 대성당이 워낙 거대하다보니 스테인드글라스가 근사하게 되어 있더라도 어쩐지 휑하고 스산한 느낌이 든다.# 랭스는 프랑스에서 열두 번째로 큰 도시다. 우리나라보다 수도권 집중이 덜 하고 지방소도시가 발달된 프랑스라고는 하지만, 앞서 다녔던 도시가 툴루즈나 보르도처럼 랭스보다 큰 도시였다보니 랭스가 작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랭스를 올 때 파리에서 열차를 타고 온 게 아니라 에페흐네(남쪽 방면)에서부터 걸어서 왔다보니, 기차역에서부터 랭스 대성당에 이르는 시내를 제대로 둘러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랭스에는 보르도와 마찬가지로 트램이 잘 되어 있는데, 랭스 시내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대부분 장소는 걸어서 이동하기에 충분했다.
# 열차 시간이 가까워짐에 따라 드후에 데흘롱 광장(Pl. Drouet d’Erlon)을 따라 기차역으로 이동했다. 기차역 앞으로 조성된 널따란 광장에는 햇빛을 받으며 활동하는 가족 단위의 인파가 눈에 띄었다.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이후 파리행 직행열차는 채 50분이 안 되어 나를 파리 동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자리를 지정할 수 있는 경우 창가에 자리를 고르는 편인데, 파리를 진입하면서 달라지는 풍경이 점점 시야를 채운다. 과학박물관, 생드니 운하, 트램 노선이 차례차례 나타나고, 건물과 사람으로 꽉 들어찬 파리의 풍경이 빈틈없이 사방을 메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울보다도 작은 이 도시에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것들이 집약되어 있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렸다.
# 랭스의 숙소에 도착한 어젯밤부터 걸을 때마다 발가락에 통증을 느꼈는데, 처음에는 너무 장거리를 걸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8~9시간 거의 쉼없이 40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를 걸은 적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던 것 같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45km를 달릴 수 있는 걸까?) 군대에서 행군을 하더라도 며칠에 걸쳐 나눠서 하게 된다. 또 20대 초반 제주도 올레길을 1 코스에서 14코스까지 트레킹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각각의 코스는 대략 15~20km로 짜여 있었다. 때문에 발에 통증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룻밤 머물고 다음날 오후가 되어도 통증이 계속되자 혹시 신발이 맞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신발을 살 때는 분명 41 정사이즈를 샀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볼이 좁은 것 같았다. 가게에서 견적을 내려고 신발을 잠시 신어볼 때 약간 뻑뻑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신다보면 길이 들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게 맞지 않는 신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처음에는 문제를 못 느꼈던 신발이 나중에 알고보니 나한테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건가, 파리에 도착한 뒤 원래 있던 신발과 크기를 계속 비교해본다. 발사이즈 자체에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발가락쪽으로 올 수록 좀 더 볼이 좁아질 뿐이다. 그런데 그 사소한 차이가 계속해서 발에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발에 맞는 신발을 신는 것도 인간관계와 꼭 닮았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Vᵉ arrondissement de Paris > Ma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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