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22일의 일기: 빌라 사보아(Villa Savoye)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2. 22:53
# 마지막 노동경제학 수업이 끝났고, 교수와 5월에 있을 발표에 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발표 그룹을 아직 정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나도 그러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이미 가을학기부터 함께했던 몇몇 무리들은 자연히 한 그룹을 이뤘고, 그렇게 형성된 그룹이 암묵적이기는 해도 꽤 명확했기 때문에 나는 일찌감치 혼자 발표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룹이 다급해진 한 친구가 내게 같이 발표를 하겠냐고 의사를 물었지만, 그의 발표주제(집단 협상력)는 내 관심주제와 거리가 있었고 완곡히 거절했다. 그룹을 이루는 게 의무사항은 아니고, 혼자서 못할 일도 아니다. 아시아 학생을 깍두기 취급하다가 필요에 의해 말을 걸어오는 것도 달갑지 않다.
14구에서 다시 5구로 돌아오니 딱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이른 점심을 먹은 뒤에는 낮잠을 청했다. 한 시간 정도 긴 낮잠에서 깨어난 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세탁소에 갔다. 바지 밑단을 줄이기 위해서다. 바지 통이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기 때문에 바지 끝을 조금 잘라야 한다는 아저씨의 설명이었는데,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아주머니는 자르지 않는 방향으로 한번 접어올려보겠다고 했다. 이어서 부부간에 옥신각신 짧은 실랑이가 오갔다. 기술적으로 자르는 게 맞는데 왜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하냐는 아저씨의 말이다. 아저씨는 아주머니가 좋게 좋게 해주려다보니 쓸데없는 말을 했다며 조금 자르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 내가 봐도 자르지 않은 채로 수선을 하면 주름이 생길 것 같아 알겠다고 하고 세탁소를 나섰다.
# 세탁소를 나선 뒤 뤽상부르 공원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오페라 지역까지 나갔다. 생 미셸 거리를 따라 내려가다 오르세 미술관까지 센 강변을 따라 달리고, 콩코흐드 다리를 지나 광장에 들어섰다. 이어 생플로헝탕 가(R Saint-Florentin)를 따라 9구까지 올라간 다음, 올랑피아(l'Olympia)가 나타나는 지점에서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 생라자르 역에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 자전거를 세웠다. 그 뒤 오베흐 역(Auber)에서 빨간색 RER A 노선을 탔다.
# 2층 열차는 에투알과 라데팡스를 지나 파리 근교의 푸아시(Poissy)에서 멈춰섰다. 역에서 나오니 이민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절반 이상이어서 근교에 온 게 실감되었다. 50번 버스를 탔는데 방향을 잘못 타서 승객에게 길을 물은 뒤 반대 방향 버스로 갈아탔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앳된 흑인 여학생은 어리버리한 아시아 사람이 신기하다는 듯 웃음기를 머금으면서도 시종일관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이번에는 주소를 제대로 찾아서 빌라 사보아(Villa Savoye)에 잘 도착했다. 르 코르뷔지에가 1931년 의뢰인 사보아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짧은 정원길을 오른쪽으로 꺾으면 항상 사진 속으로만 보던 빌라 사보아가 나타난다. 생각보다 아담한 크기의 건축물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건물 중에는 현재에도 사람이 거주하는 곳들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빌라 사보아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빌라 사보아는 르 코르뷔지에가 의뢰인에게 양도할 당시 가구조차 없던 상태 그대로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나는 폐관시간을 앞두고 도착했기 때문에 아주머니가 일반요금(plein tarif)을 받지 않고 요령껏 가격을 깎아 주셨다.
1층 차고(車庫)는 시청각실로 활용되고 있고, 2층부터 거주공간이 나타난다. 시청각 자료에 따르면 르 코르뷔지에는 미니멀리즘에 충실하고자 거주공간에서 동선을 최소화할 수 있는 설계를 택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2층부터 완전한 거주공간을 두기 위해 1층에는 가사도우미, 운전기사 등을 위한 공간까지 두었다는 점이다. 2층 거주공간을 보다보면 현대인의 관점에서 조금 심심한 느낌은 있지만, 20세기 초까지, 그러니까 양차 세계대전이 있기 전까지 이러한 양식은 분명 혁신적이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아들 방이 매우 넓은 게 인상적이었다. (이 무슨 결론..?!)
오늘날 그 기능이 늘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건 아니지만 ‘필로티’는 르 코르뷔지에 건축을 대표하는 요소 중 하나다. 필로티로써 하중을 지탱함으로써 1층에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공간을 모아놓는 한편 2층부터는 ‘자유로운 파사드’를 구현할 수 있게 된다. 자유롭다 함은 제약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로 단순히 자유분방하고 무질서한 파사드를 취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하학적인 선을 최대한 살린 르 코르뷔지에의 건물에서는 건물 주위를 에워싼 수목(樹木)들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도록 ‘가로 수평창’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이른바 돔-이노(Dom-ino)라는 모듈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널따랗고 ‘자유로운 평면’을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끝으로 건물 위에는 ‘옥상 테라스’를 마련해 두었다. 필로티, 자유로운 파사드, 가로 수평창, 자유로운 평면, 옥상-테라스는 빌라 사보아를 특징짓는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세계다.
폐관시간을 앞두고 미리 건물을 나와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출입문에서 테이블을 지키고 있던 아주머니가 부산스레 짐을 싸길래, 정원만 조금 산책하고 나가겠다고 했다. 괘념치 말라(Pas de souci)라는 프랑스인 특유의 기운 넘치는 답변. 일상에서 쓰이는 프랑스어는 잘 쓰는 경우 사근사근하고 근사하고 멋스런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여하간 실용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실내도 실내지만 단정한 파사드도 빌사 사보아의 매력이다. 오후 다섯 시의 햇살은 퍽 따뜻해서 새하얀 파사드에 온기가 담겼다. 정원의 높은 나무들이 군데군데 그늘을 드리우자, 파사드의 백색 평면은 볕과 그늘이 뒤섞인 새로운 패턴으로 시선을 끌어들였다.
# 50번 버스를 타고 빌라 사보아로 오던 길에 벚꽃이 만개한 걸 보고, 푸아시 역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벚꽃이 핀 길을 따라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빌라 사보아 바로 옆 르 코르뷔지에 고등학교에서 꺄르르 웃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쓸쓸하게 들려왔다. 왕성하게 핀 벚꽃에 심취해 휴대폰으로 사진을 담는데, 내 옆을 지나던 행인이 내게 ‘싸쿠하, 싸쿠하(Sakura, Sakura)’하며 아마 그가 아는 몇 안 되는 일본어 단어일 바로 그 ‘싸쿠하’를 신나게 외친다. 처음에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내 눈을 응시하며 뭐라 하는지 이해를 못했던 나는 조금 웃어보였었다. 어쨌든 벚꽃이 참 예쁘게 폈다. 한국에서 보던 것처럼 소담하고 정취가 있지는 않지만, 분명 화사함은 있다. 프랑스의 가로수들은 가지치기를 철저하게 하다보니, 그 정도가 지나쳐 가끔은 너무 인위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또 그렇게 자라도록 유도된 수목(樹木)들은 더러 무서울 정도로 많은 꽃을 피운다.
# 오베흐 역으로 돌아와 카페에서 잠시 머물며 커피를 마신 뒤, 가까운 약국에서 입술이 트고 건조한 데 바를 약을 하나 샀다. 흔한 립밤을 생각했던 나로서는 약사가 10유로짜리 립스틱을 들고 오길래 좀 더 저렴한 물건을 부탁했다. 오늘 아침에 보았던 FF 교수의 얼굴도 그렇고, 약사의 무표정한 얼굴도 그렇고 어딘가 잠시 생기를 잃고 늙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생라자르 역으로 나가 미납된 통신비를 결제하고 다시 오페라 구역으로 돌아와 27번 버스를 타고 팡테옹으로 되돌아 왔다.
Bien avant les images et les couleurs,
la source du chant s'imaginait,
à bouche fermée,
comme une chimère captive'Vᵉ arrondissement de Paris > Ma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 24일의 일기: 마로니에(marronier) (0) 2022.03.25 3월 23일의 일기: 국수주의(國粹主義)의 망령들 (0) 2022.03.23 3월 21일의 일기: 힘들이지 않는 법 (0) 2022.03.22 3월 20일의 일기: 신발은 발에 맞아야 (0) 2022.03.21 3월 19일의 일기: 신기루(蜃氣樓) (0) 2022.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