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23일의 일기: 국수주의(國粹主義)의 망령들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3. 18:21
# 늦깎이로 잠시나마 외국에 와 공부하며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세상은 생각보다 글로벌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경제가 서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과 국가를 기반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나도 그러하고 이곳에서 만나는 각국의 학생들은 모두 자국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움직인다.
예를 들어 오늘 만난 한 중국인 유학생이 자국에 대해 가진 자신감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얘기를 들으며 중국이 세계경제를 쥐락펴락 할 만큼 성장했다는 데에는 동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소프트파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일본, 한국, 대만, 베트남, 인도 등등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국 가운데 중국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다. 어느 정도 상호이해에 기반해 국가간 관계를 구축하는 북미나 유럽과는 주변국과의 관계가 판이하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은 자국의 미래를 대단히 낙관적으로 자평한다. 당장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성장이 크게 체감되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가까운 미래에 중국의 경제규모(국가 GDP)가 미국의 경제규모를 능가할 거라는 점은 자명한 일지만, 극심한 빈부격차, 투명하지 않은 시장 운영 등을 보면 중국의 도전이 지속가능할지 낙관적인 것 같지만은 않다.
# 오후 게임 이론 수업은 그리 흥미로운 내용을 다루지는 않았다. 스코틀랜드 억양이 강하고 이곳에서는 흔치 않게 학생을 몰아붙이는 방식의 교수법이 조금 부답스럽게 느껴진다. (스코틀랜드 스타일인가?) 그나마 두 개의 학생발표가 오늘 수업에서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하나는 팬데믹 사례, 다른 하나는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주제로 발표한다. 항상 분방해 보이는 이곳의 학생들이지만 발표가 굉장히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다. 노르웨이에서 온 금발의 학생은 생긋생긋 웃으며 무사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스크립트를 든 오른손은 크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열성적으로 발표하고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전달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발표자 가운데에서는 노르웨이에서 온 학생도 있었고 모두가 프랑스인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건 이곳의 학생들은 우리나라의 대학생들보다 훨씬 활기가 있고 진중하다는 점이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D와 잠시 얘기를 나눴다. 다소 피곤한 얼굴을 한 D는 이번 학기 수업을 여덟 개나 듣고 있다고 한다. 여서일곱 개를 듣고 있는 내가 앓는 소리 할 때가 아니구나, 생각하면서 이곳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D가 프랑스 학생들은 독일 학생들보다 토론은 안 하고 필기에만 집중한다는 말을 한다. (실제로 프랑스학생들이 한국학생들 만큼 필기를 무척 열심히 하는 편이기는 하다.) 어쩌다 프랑스에서의 생활, 파리에서의 생활에 대해 얘기하다보면 은연중에 독일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 그다.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준거점을 가지고 판단하는구나, 다시 생각한다.
D가 보기에는 프랑스는 엘리트주의도 심하고, 특히 경쟁을 뚫고 이곳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았다는 자긍심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그 부분은 나도 공감한다. 다만 프랑스에 비해서 독일의 학업분위기가 더 수평적이고 의견교환이 자유로운지는 독일을 가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D의 말에 따르면 독일은 토론식 수업이 더 잘 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공부하는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다보면,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독일에서의 공부도 순탄하지만은 않겠구나 생각하곤 했었다. 결국 사람이 자신에게 엄격해지기 어렵듯, 자신이 속한 지역과 국가를 바라보는 것 또한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다.마찬가지로 오늘날 우파 정당이 약진하고 있는 이곳 프랑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 D가 들려준 말에 따르면, 프랑스 사람들은 논쟁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논쟁에서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인 것 같다고 말하는데, 프랑스 문화에 그리 깊숙히 들어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어쨌든간 우리가 '세계화'되었다고 말할 때 정확히 무엇이 세계화된 것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우리가 '세계화'라고 거창하게 명명하고 싶어하는 만큼 그리 사해동포주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편협해지기 쉽다.
중간에 엘루이즈라는 여학생이 들어와 요리를 시작했다. 영화에 나오는 배우처럼 파란 눈동자에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앳된 여학생으로 항상 오며가며 인사만 하다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를 하다보니 엘루이즈는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호방한 성격이 느껴진다. 몇 가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와 일찌감치 뻗었다. 별 다른 이유도 없이 피로가 몰려오는 하루다.'Vᵉ arrondissement de Paris > Ma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 25일의 일기: 마음(de cœur) (0) 2022.03.25 3월 24일의 일기: 마로니에(marronier) (0) 2022.03.25 3월 22일의 일기: 빌라 사보아(Villa Savoye) (0) 2022.03.22 3월 21일의 일기: 힘들이지 않는 법 (0) 2022.03.22 3월 20일의 일기: 신발은 발에 맞아야 (0) 2022.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