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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의 일기: 마음(de cœur)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5. 17:25
# 파리에서 자전거를 타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다. 처음에는 나 역시 파리가 자전거를 타기에 좋다고 생각했지만, 자전거를 타는 많은 사람들이 헬멧을 착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은 차량과 보행자, 자전거를 타는 사람 모두가 신호를 지키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공용자전거인 벨리브를 자주 이용하기 전까지는 파리가 서울만큼 차가 많지 않은 곳이다보니 신호등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그런가보다, 생각했었는데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다보니 서로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 건 불편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대로 리듬을 체득한 모양으로 요리조리 잘 빠져다닌다.
한 번은 자전거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오니 가방에 새똥이 눌러붙어 있었는데 어찌나 독한지 아무리 박박 닦아도 떨어지질 않는다. 자연친화적인(?) 이곳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부분이다. 또한 파리는 돌로 되어 있는 도로도 많고, 아스팔트로 된 도로라도 한국보다 포장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어서 자전거를 탈 때 주행감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을 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곳들이 꽤 많아서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 자체는 전반적으로 편리하다. 또 이런저런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서울보다는 자전거를 타기에 좋은 건 분명하다. 일단 차가 훨씬 적고 난폭 운전을 하는 차량을 본 적이 없다.
# 아시아인들의 강박적인 규칙 준수도 한몫 하겠지만, 이곳 프랑스에서 계획을 세워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특히나 어려운 일이다. 필요한 정보에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필요한 정보를 구했더라도 정보에서 알려준 대로 실제 상황에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가령 분명 문이 열려 있어야 할 시간에 가게가 닫혀 있다든가, 예정에 없는 파업으로 인해 버스나 메트로 운행이 대폭 축소된다든가, 급작스런 공사일정 연기로 인해 운동시설이 더 길게 문을 닫는다든가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횡단보도는 건너는 일조차도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원하는 대로 건넌다. 오늘은 화요일, 그러니까 나흘 전에 수선을 맡긴 옷을 찾으러 약속한 시간에 찾아갔건만 주말도 아닌 월요일에 가능하단다. 흥정도 세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기 때문에 일을 쉬고 싶을 땐 쉬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시간을 ‘느긋하게’ 활용한다기보다는 ‘허투루’ 활용한다고 느낄 때가 적지 않다. 과연 이곳 사람들은 계획이란 걸 세우면서 살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계절에 따른 계획과 계약에 따른 계획과 매뉴얼에 따른 기초적인 계획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럼에도 거리에 정성스런 요리와 질 좋은 옷들, 고급스런 서적들이 가득한 걸 보면, 정말 계획이라는 게 없이도 삶이 굴러갈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대단히 혼란스럽다.
# 요새 파리 시내에 설치된 JCDecaux 입간판에 새로운 광고가 깔렸다. 보통 각종 온라인 플랫폼이나 게임, 금융 광고가 많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곳에는 길거리에 의류 브랜드나 전시공연 광고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내걸린 루이비통 광고는 그 자체로는 새로울 게 없지만, ‘오징어 게임’에 나왔던 한국 여배우가 모델로 등장한다는 점이 아무래도 눈길을 끈다. 눈에 익은 얼굴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파리 1구를 가도, 5구를 가도, 7구를 가도 가장 번화한 길목마다 죄다 동일 배우의 루이비통 광고여서 볼 때마다 조금 놀란다.
# 오늘 아침은 1구 일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른 아침 텔레스코프 카페(Café Télescope)에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아침 열 시에 가까워지면서부터는 비좁은 카페를 찾는 ‘관광객’—물론 나도 아침부터 1구까지 행차한 관광객 중 한 명이었다—이 많아져서 팔레 후아얄 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햇빛을 쬐며 조금 더 책을 읽었다. 지난 번 팔레 후아얄 공원을 찾았을 때보다는 제법 신록(新綠)이 피어오르고 자줏빛 꽃들도 흐드러지게 꽃망울을 터뜨렸다. 귀신 같이 햇볕을 감지한 이곳 사람들은 벤치나 의자에 앉아 새초롬하게 일광욕을 하는 고양이처럼 미동도 않고 가만히 있다. 슬몃슬몃 쳐다보자면 마네킹 흉내를 내는 행위예술 중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여전히 드는 생각: 이 사람들 일은 도대체 언제 하나..)
# 점심을 먹고 잠시 7구의 걀리마흐 서점(Gallimard)에 다녀왔다. 걀리마흐는 프랑스의 대형 출판사로 생제르맹 거리가 끝나는 지점 근처에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서점이 자리잡고 있다. 다른 출판사의 책들도 일부 취급하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걀리마흐에서 출판된 특유의 상아색깔 책들을 절대 다수로 팔고 있다. 프랑스어가 좀 더 수월했더라면 어떤 책이라도 하나 사서 읽었겠지만, 딱히 책을 사지도 않으면서 서점을 들르는 건 우리나라와는 다른 생김새의 책들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구경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오후에는 한 주 수업의 마침표를 찍는 프랑스어 수업을 듣기 위해 다시 라탕 지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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