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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의 일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émathèque française)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7. 20:02
# 일요일 기숙사는 시에스타에 빠진 것처럼 기분 좋게 조용하고 한적하다. 이 시간이면 항상 학생들로 붐비던 공용주방도 오늘만큼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 아마도 많은 학생들은 봄바람과 햇볕을 찾아 바깥 어디로든 나갔을 것이다. 학교 현관을 출입하는 학생은 일요일에도 여전히 있지만, 나른한 봄기운이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어서 방안에 머무르던 사람도 설레게 만든다. 이따금 사람들이 내는 각양각색의 소음—문을 여닫는소리, 대화하는 소리, 자전거의 체인이 돌아가는 소리, 굽 높은 신발이 또각또각 지나가는 소리—이 따스한 공기를 투명하게 가로지른다. ‘정적(靜寂)’이 들릴 만큼 한가하고 평온한 한낮이다.
# 파리에 있다보면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많다. 너무 많아서 시간을 쪼개 써도 모랄 정도. 여유 있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도 파리에 살며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하건만, 항상 고를 수 있는 여러 선택지 가운데에서 고민에 빠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여유가 생기는 날에는 박물관도 가보고 싶고, 공원도 가보고 싶고, 분위기 있는 거리를 걸어보고도 싶고 하는 식이다. 오후 기숙사를 나섰을 때 거리는 마치 전쟁 중인 도시처럼 고요했다. 오늘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구경하러 가보기로 마음 먹었다.
# 두 달 넘게 파리에 머무르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도시가 대단히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인상일 것이다. 서울의 6분의 일 되는 크기에 차도와 인도가 쾌적하게 뚫려 있고 아레나 공연장이나 대형 상업시설(Les Halles)처럼 있을 만한 건 다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공원들, 박물관, 성당, 그리고 다섯개의 대형 역사—생 라자르, 북, 동, 리옹, 몽파르나스 역—가 그 사이사이에 들어서 있다. 그럼에도 교통체증이라 할 만한 게 없고, 질서정연한 건물 양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파리에 도착한 이후부터 줄곧 의식의 한켠을 지배하는 것 같다.
혹자는 파리 시내의 위생 관념에 고개를 절레절레하고, 길거리에서 노숙자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데다, 방리유의 도시환경이 대체로 열악하다는 점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앞서 나열한 장점으로 인해 도시가 전반적으로 멋지다는 느낌이 든다. 균형이 잡혀 있다는 의미에서 멋지다. 도시계획을 꼼꼼히 세우는 독일의 도시들도 이와 같은 느낌일지 궁금하다. 독일은 전후에 새로 착수한 도시계획이 많을 테니 더 잘 되어있을 것 같기도 하다.
# 이곳 사람들에 대한 인상도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대체로 상냥한 편으로, 더 정확하게는 이들의 사교적인 억양과 언어가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실제 상냥하다기보다는 상냥해 보일 수 있는 문화나 생활습관이 몸에 베어 있는 것 같다. 또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 학생들과 마주하다보면 적어도 영국과 독일, 프랑스 세 나라의 사람들이 서로 상당히 다른 느낌을 풍긴다는 걸 구별하게 된다. 원래 가지고 있던 스테레오타입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생활에서 쓰는 제스쳐나 즐겨 쓰는 표현, 표정을 실제 보고 들으면서 좀 더 구체화되는 느낌이랄까.
다른 한편으로는 편견이 걷혀지는 면도 있다. 정말 티가 나지 않을 뿐, 프랑스 사람들의 은근하고 부드러운 말투 이면에는 타협이 어려울 만큼 단호하고 완고한 성격이 있다. 보통 독일 사람은 외양부터 단단함이 느껴지는 것과 다르다. 단적으로, 프랑스 정치에서 멜랑숑이나 제무르, 마린 르 펜 같은 사람들이 상당한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은 프랑스 사람들의 기본 성향을 잘 보여준다. 감성을 자극하는 예술작품이 쏟아져 나온 나라임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이나 분노, 좌절감을 일상생활에서 드러내는 걸 극도로 자제한다. 그러다가 그러한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장(場)이 마련되면 여과없이 쏟아낸다.
한편 영국사람들은 대체로 무언가 단순화하는 것을 잘하고—유럽언어 중 영어만큼 관사가 간편한 언어가 또있을까—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생활양식은 보편성을 띠기가 쉽다. 영국이 프랑스에 비해 과거 식민국과의 관계가 수월한 점도 이런 문화 차이가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가끔 프랑스인들이 영국의 문화를 평가절하하는 뉘앙스—영국사람들은 모든 걸 생략해 버린다며—로 말하는 걸 들을 때가 있는데, 오히려 영국과 같은 생략과 단순화야말로 때에 따라 필요한 게 아니겠나 싶다. 프랑스 사람들의 사소한 표현방식이나 예법이 영국 사람들에 비해 정교하고 세련된 느낌이 드는 건 분명하지만, 오늘날 라틴어나 희랍어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영어이기도 하고.
# 해가 빠르게 길어져서 4월이 되지도 않았는데 저녁 여덟 시가 넘도록 해가 완전히 떨어지지 않는다. 로미 슈나이더(Romy Schneider)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별로 전시를 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어제도 이미 장시간 전시를 본 상태였다. 상영시간에 맞춰 영화를 보러 온 것도 아니었으므로 전문서점을 구경할 겸 가벼운 마음으로 건물에 들어섰다.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닌데 독특한 DVD와 영화비평서적, 영화전문서적, 기념품이 가득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나는 에릭 로메르와 관련된 책이나 DVD를 찾았는데, 기념품으로 챙겨갈 만한 물건을 찾지는 못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특별판 DVD—안에 만화책(bande dessinée)이 동봉되어 있었다—도 전시되어 있어 잠시 혹했지만 가격표를 보고 일단 다음 방문을 기약했다. 기본적으로 영화감독 이름 순으로 DVD가 진열되어 있고 감독의 대표작을 묶어놓은 DVD 전집 또한 매우 다양하다. 장 피에르 레오나 멜 깁슨처럼 특정 배우를 테마로 한 DVD 전집도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 시네마테크 프랑세스를 오며가는 동안 자연히 베흐시 공원을 가로지르게 되는데, 따사로운 햇볕을 만끽하는 시민들로 가득해서 지난 번 찾았을 때의 한적함은 온데간데 없다. 무리를 이루어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고 혼자서 무념무상으로 누워 있는 사람들도 있다. 푸른 잔디밭마다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모양새로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잠시 사파리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 다리에 힘이 풀린 임팔라처럼 사람들은 나른하게 주저앉아 있기도 하고, 비스듬이 누워 잠을 청하기도 하고, 턱을 괸 채 배를 깔고 누워 있기도 한다. 자유로운 풍경이면서도 대단히 개인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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