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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의 일기: 밤산책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8. 07:22
# 간밤에는 시네마테크 라탕에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펀치 드렁크 러브>를 봤다. 파리에 도착하고 나서 안착하기까지 행정 문제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이후로 행정을 맡는 곳들은 가급적 갈 일 자체를 없애고 있다), 영화를 좋아하고 예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파리만한 곳은 없다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미술, 음악, 건축, 공연, 영화 어느 것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양질의 볼거리가 가득하다. 시간적으로도 중세에서부터 완전 최신 흐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범주의 예술 작품이 마치 도시 전체가 호흡하듯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파리가 예술의 도시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꼭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엄청 많다. 파리에 한 해를 머무른다 해도 파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보지는 못할 거라 생각하면 벌써부터 아쉽다. 다만 이곳에서 제대로 즐기고 있지 못하는 한 가지라고 하면 아마 ‘음식’이지 않을까 싶다. 대개 비건식으로 먹으려고 노력할 뿐, 학교에서 제공되는 프랑스식 요리—프랑스 학생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다—가 내가 이곳에서 경험하는 거의 유일한 프랑스 요리다.
# 월요일은 항상 수업을 듣느라 시간을 보내는데, 오늘은 이곳에 와서 가장 좋아하는 수업인 재정학 수업의 마지막 날이었다. 다른 주제를 다뤄서라도 몇 차례 수업이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제 남은 건 5월 시험 뿐이다. 재정학에 앞선 연금 정책 수업에는 연금개혁에 대한 내용을 다뤘고, 지난 주에 이어 연금 개혁을 주제로 수업이 이뤄졌다. 이번 수업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국가의 사례가 다뤄졌다. 가장 먼저 2014년 이탈리아에서 은행부실 사태가 EU 차원에서 대두되자 이탈리아 정부가 정부지출 삭감을 목적으로 정책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날치기로 연금개혁을 시행한 사례가 다뤄졌다.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연금개혁을 5개월만에 끝냈고, 단기적으로 정부지출은 줄였을지 모르나, 연금정책에 애초에 겨냥했던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던 게 당연하다. 반면 90년대 복지국가라는 국가운영 방향에 커다란 위기를 경험했던 스웨덴은 아주 성공적으로 연금개혁을 한 사례로 소개된다. 스웨덴의 연금개혁에는 20년 가량 소요되었다고 하는데, 수업에서 소개되는 대부분의 연금 정책들은 대체로 20년 이상을 요하는 만큼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매우 어렵다.
에마뉘엘 마크롱의 취임과 더불어 연금 개혁을 겨냥하고 있던 프랑스의 경우, 2020년 팬데믹 발병으로 인해 개혁이 무기한 연기되었고 에마뉘엘 마크롱의 두 번째 대선 정국이 도래하면서 다시금 새로운 연금정책—정년을 늦출 것이냐(우파), 앞당길 것이냐(좌파) 등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곳에서도 연금 개혁은 못해도 30년 안팎을 내다보고 진행한다. 다만 실제 정치인들이 현안을 다룰 때는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목표로 하는 연금개혁이 무엇인가보다는, 어떤 연금정책이 얼마나 유권자들에게 먹힐 수 있는가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개혁이 지지부진한 작금의 상황을 교수는 건조하게 하지만 열띤 논조로 이야기한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연금제도가 산업별로 굉장히 세분화되어 있어서 연금정책의 효율이 낮은데, 개혁 드라이브를 걸려고 하면 상대적으로 손해를 입게 되는 집단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난다. 2019년도 RATP(메트로)와 SNCF(광역철도)가 3개월간—도대체 1년의 4분의 1의 기간 동안 시민들은 그 불편함을 어떻게 감수했을까—파업을 벌인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사실 프랑스는 EU 평균과 비교를 해도 모든 계정에서 확연하게 정부지출이 높은 편이고, 프랑스의 사회복지 시스템이 얼마나 지속가능한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다만 정부적자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투자를 하지 않으면서까지 부채를 쓰지 않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재정학의 AD 교수의 경우, 매 수업 정부의 회계결산 자료를 분석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프랑스의 재정상황이 적정 궤도 안에서 관리되고 있고, 오히려 독일의 경우 필요한 정부 투자에 미온적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2000년대 들어 독일의 노동개혁을 높이 평가하고 2000년대 이후 개혁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프랑스가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운 현 상황을 실제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돌발변수로 인해 원유와 가스 가격이 치솟는 상황이 유럽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입체적으로 분석해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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