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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의 일기: 6구를 걷다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30. 17:45
# 대선을 앞두고 있는 이곳에서는 대체로 마크롱의 당선을 예측하는 분위기다. 후보가 많기도 하지만, 여론몰이를 하고 있는 마린 르펜(극우)이나 멜랑숑(좌익) 같은 정치인들은 상당한 지지세를 확보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도 유권자로의 확장성이 제한적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2012년부터 세 차례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옛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고 있는 마린 르펜은 이번 대선을 끝으로 더 이상 당을 대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배수의 진을 치면서까지 마크롱을 추격하고는 있지만 결과를 뒤집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르펜과 멜랑숑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현재 결선투표가 가장 유력한 두 후보 마크롱과 르펜의 공식 슬로건을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Ensemble, la France!(함께, 프랑스를!)”, “Choisir la France(프랑스를 선택하다)”. 앞의 것이 마크롱의 슬로건으로, ‘전진하는 공화국(la publique en marche!)’이라는 당명에도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ensemble’과 느낌표를 끼워넣음으로써 좌파와 중도 유권자까지 염두에 둔 영리함이 보인다. 한편 마린 르펜의 슬로건은 상당히 차분한 톤으로, 프랑스적인 정체성을 강조하고 국민정서를 자극하는 국민연합의 주요 정강이 하나의 합리적인 대안으로 통할 수 있다고 유권자에게 은근하게 다가서는 느낌이다.
현재 프랑스에서 득세하고 있는 정당들의 이름도 흥미롭다. 국민연합의 옛 이름인 ‘국민전선’도 그렇지만, 이번 대선에서 세 번째로 높은 지지율을 보이며 대선 판세에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는 장 뤽 멜랑숑이 속한 좌파 정당의 이름은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a france insoumise)’다. 극우정당이든 좌파정당이든 호전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정당 이름만 들어서는 유치한 것 같기도 하지만 직관적인 면은 좋다.
# 매주 파리대학에서 수업이 하나씩 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6구에 갈 일은 있지만 보통 센 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편이다. 몇 번 27번 버스를 탔는데 낮 시간에도 센 강변 차로가 꽤 막혀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오늘은 소화도 시킬 겸 팡테옹에서부터 6구에 있는 수업 장소까지 쭉 걸어가보려고 기숙사를 조금 일찍 나섰다. 파리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파리대학 위치를 확인해 둘 겸 6구까지 걸어다녀온 이후 걸어서 수업장소에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사실 내 생활반경은 무프타흐 시장이 거의 중심이라 할 수 있고, 6구 방면으로 왕래하기가 수월한 소르본 대학 앞과는 살짝 거리가 있다. 게다가 5구와 6구의 경계에는 뤽상부르 공원이 가로막고 있는데, 뤽상부르 공원은 파리 안에서도 평일에도 인파가 몰리는 곳인지라 기숙사에서 가장 가까운 공원이면서도 좀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공원을 가봐야 사람만 구경하기 때문이다. 더더욱 6구 방면으로 나갈 일이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6구는 그리 가깝게 느껴지는 곳은 아니다.
어제부터 파리 시내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뤽상부르 공원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공원에 들어간 다음 뤽상부르 궁 앞을 가로질러서 보나파흐트 가(R Bonaparte)를 따라 올라갔다.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6구의 분위기와 5구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생제르맹 지역의 주축을 이루는 6~7구는 학생인구가 주를 이루는 5구와는 상업지구의 구성부터가 다르다. 5구에는 보통 유서 깊은 영화관이나 서점이 많은 반면, 6구는 전반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근사한 상점들이 많다.
생 쉴피스 성당(Église Saint-Sulpice)은 이전에 밤 산책을 하면서 한 번 왔었는데, 낮에 보니 느낌이 퍽 다르다. 건물이 비대칭이라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파리대학을 왕래하며 자연스레 지나쳤던 카페 레 되 마고(Café les deux magots)와 생제르망 데프레 수도원(Église de Saint Germain des Prés)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분명 대중교통을 타고 몇 번인가 지나쳤던 거리인데 두 발로 걸으며 이동을 하니 6구의 풍경이 새삼 달리 보여서 기분 전환이 확실히 되었다.
# 결정이론 수업의 후반부는 MA 교수가 바통을 이어받아 진행한다. 커리큘럼상 학사일정의 후반부는 게임이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결정이론의 심화된 내용이 이어졌다. MA 교수는 아마도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 이민자 출신인 것 같았는데, 선호(preference) 문제의 예시로 런던, 로마, 칸다하르 세 도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교수법도 다른 수업과 꽤 달라서 판서(板書) 분량이 많은 것도 놀랍지만, 기계적이라 느낄 만큼 백묵으로 술술 수식을 적어나가는 걸 보고도 놀랐다. 무엇보다 판서가 깔끔하다. 학생의 질문에 답하는 동안 백묵가루가 가득 묻은 손을 휴지로 박박 닦는 MA 교수를 보면서, 우리나라 고시촌의 어지간한 일타 강사보다도 판서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수업 내용을 따라가는 데 급급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 개인적으로는 BH 교수보다는 지금 교수의 수업이 좋다.
참, 그리고 프랑스인 교수의 영어를 이해하는 건 아직도 쉽지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second axiom’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하면 ‘세컨드 액시엄’이 아니라 ‘쓰공드 액시엄’이 되는 식이다. 이 부분은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단시간에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처음에는 불편함을 많이 느꼈었는데, 요즘은 나중에 영어를 쓰게 되는 다른 자리를 가더라도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훈련을 받는다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나부터도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 다행히 교수들이 학생과의 소통에 대단히 적극적이고, 수업자료도 충분해서 내 나름의 학습법을 좀 더 고민해야 할 것 같다.
# 수업이 끝난 뒤에는 잠시 루브르 지역의 카페에서 오전에 읽던 논문을 마저 읽었다. 카페를 나선 다음에는 오페라 지역까지 걸어갔다가 분홍색 7호선을 타고 몽주 광장으로 돌아왔다. 카페에 들르기 전 결정 이론 수업에서 함께 팀 과제를 했던 메디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 과제가 너무 많아 돌아버릴 지경이란다. 이곳 학생들은 겉으로 보았을 땐 대체로 무사태평해 보여서 나도 힘든 내색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사람 사는 게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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