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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일의 일기: 비엔느(Vienne)Vᵉ arrondissement de Paris/Avril 2022. 4. 12. 16:54
# 내가 투르에서 2박을 한 ‘The People’은 프랑스에서는 처음보는 기업형 호스텔이다. 2~6층까지를 객실을 쓰고 있고, 1층은 공용주방과 휴식공간, 0층은 리셉션, -1층은 레스토랑과 정원으로 되어 있다. 루트 중앙역까지 걸어서 10분이 조금 넘게 걸리기 때문에 위치가 좋다고는 할 수 없음에도 객실이 모자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리셉션을 지키는 젊은이들은 매우 밝고 그 중 한 명은 간단한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간밤에 객실의 창문을 열어 놓고 0층의 공용공간에 내려와 이런저런 글을 쓰고 방으로 올라가니 작은 날벌레들이 전등 아래에 모여들었다. 내가 머물렀던 곳은 6층인데 바로 옆에 가로수가 있었다. 아마도 나무에서 옮겨온 잔벌레인 모양이다. 리셉션으로 내려가 벌레를 처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물었지만, 일단 옮길 수 있는 방은 없었고 스프레이도 없다고 하니 잠을 자려면 직접 처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 해가 뜨기 전 숙소를 나와 7시 35분 푸아티에 행 열차에 올라탔다. 같은 칸 열차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4명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푸아티에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여 동안 이번 대선 결과를 두고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지만, 젊은 학생들이 진지하게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정치 문제를 일상의 한 부분으로 매우 밀접하게 받아들이는 느낌이다.
한 시간 여 걸려 도착한 푸아티에 역에서 다시 버스로 갈아탔다. 샤토후(Châteaurou) 행 버스는 내 목적지인 생사방(Saint-Savin)에서 내려줄 것이다. 버스 기사에게 생사방으로 가는지를 물으니 매우 쾌활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땅딸막하고 앳된 버스 기사는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불안불안하게 운전을 했고, 45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던 버스는 거의 한 시간이 되어 생사방에 내려주었다.
# 생사방은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수도원(l’Abbeye)이 있는 곳이다. 이번 발 드 루아르 행은 일단 슈농소 성을 둘러보는 것이 기본 목적이기는 했지만, 최종 목적지는 생사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르도를 들렀을 때에도 생사방을 와보고 싶었지만 교통편이 편하지 않아 좀처럼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는데, 투르를 온 김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다른 도시를 왕래하는 버스가 하루 한 대밖에 없을 만큼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안내센터에 가서 버스 시간과 탑승장소부터 확인했다. 지금처럼 관광객이 없는 시기에 아시아에서 온 관광객은 의외인지 내게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프랑스에서는 공식적인 정보도 수시로 바뀌다보니 나중에 한 차례 더 정보를 확인 받기 위해 안내센터를 들렀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직원이 아, 한국에서 오셨다는 분~ 하면서 아는 체를 했다.
아침 수도원에는 방문객이 없어서 혼자 조용히 감상할 수 있었다. 너무 사람이 없어서 원래 이렇게 사람이 없냐고 물으니 비수기(le période de calme)라고 하는데, 그래도 너무 사람이 없어서 예약 없이 방문객에게 개별적으로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려운 용어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 영문 안내가 담긴 태블릿을 받아 수도원을 구경하겠다고 했다. 수도원 자체가 구경하기에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니어서, 길게는 한 시간 반 정도면 충분히 수도원을 둘러볼 수 있다. 지하예배당(crypt)가 닫힌 걸 빼면 수도원을 둘러보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조금씩 성경을 읽어둔 덕분에 수도원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수도원은 11세기부터 지어지기 시작해서, 방화, 약탈, 전쟁 등으로 수차례 훼손되면서도 꾸준히 복원된 덕분에 지금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주인이 바뀌는 와중에도 수도원을 계속 지키고자 했던 후원자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 줄곧 언급된다. 누벨 아키텐의 중심지와 다소 거리가 있는 이 지역에 이처럼 거대한 수도원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상징적인 것 같다. 수도원을 둘러싸고 형성된 마을은 너무나도 오래되어 낡다시피 한 건물들 뿐이다. 쇠락한 마을에 수도원만이 위용을 지키고 있다.
# 푸아티에에서 파리로 돌아가는 열차 티켓은 시간대에 따라서 가격대가 천차만별이었다. 75유로짜리 열차 티켓 대신 35유로짜리 티켓을 사려다보니 푸아티에에서 3시간 정도 남는 시간이 생겼다. 일단은 생사방에서 돌아와 ‘Gare aux papilles’라는 역내 카페에서 점심부터 해결했다. 아주머니가 무척 싹싹하고 상냥하다. 수제 도시락에 카푸치노를 주문했는데, 가게를 돌아다니며 분주하게 안부를 묻고 다니던 아주머니는 내게 음식이 맞냐고 윙크를 하며 묻는다. 프랑스 사람들은 뭐랄까, 남유럽 사람들과는 다른 리듬의, 그렇다고 북유럽 사람들의 온화함은 아닌 특유의 상냥함과 쾌활함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종종 안내방송이나 응대하는 말을 들으면 무척 장식적이고 기교를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말의 포인트는 놓치지 않는 것 같은 독특한 느낌이 있다.
# 푸아티에에 도착하면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계속 역사 안에서 기다리는 것도 지루한 일이어서 푸아티에 시내를 걸어갔다 와보기로 했다. 푸아티에를 둘러보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기 때문에, 노트르담 성당 앞에 있는 안내 센터에 들러 도시 전경(point de vue panoramique)을 볼 만한 장소가 없는지 물었다. 안내직원은 그헝휘(Grand’rue)를 따라 벨베데흐 데 뒨(Belvédère des Dunes)에 가보는 걸 추천해 줬는데, 비오는 날씨다보니 좋은 경치를 보기는 어려울 거라고도 일러주었다.
푸아티에의 지형은 조금 독특하다. 클랑 강(le Clain)을 중심으로 움푹 패인 얕은 협곡이 있고, 도시는 편평한 고원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다만 푸아티에 역은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역을 나와서 푸아티에 도심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단길을 한참 올라야 한다. 누벨 아키텐 지역의 주요 수원(水源)인 클랑 강은 비엔느 강으로 이어지고 다시 루아르 강으로 이어지는 지류다. 야트막한 협곡과 언덕이 흔하기 때문에 이곳에도 바위 틈에 지어올린 작은 주택들이 많이 보인다.
푸아티에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벨베데흐 데 뒨에 가까워질 수록 군청색 체육복 차림에 군인 용모를 한 젊은이들이 빗속을 뚫고 운동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벨베데흐 데 뒨 바로 옆에는 해병대 여단(9e Brigade d’infanterie de Marine)이 있었고, 푸아티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점에서 비에 젖은 지도를 펼쳐놓고 무언가 논의를 한 다음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아마도 훈련 중인 것 같다. 푸아티에에는 여러 교육기관이 위치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고, 시앙스포 역시 푸아티에에 캠퍼스를 두고 있다. 다만 꽤 내륙이라 할 수 있는 푸아티에에 해병대가 있다는 건 의외다.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 생도들은 겉모습만 봐도 전투력이 상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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