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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의 일기: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5. 23:25
# 팡테옹, 베르사유 궁전, 루브르 박물관. 파리에 머물면서 아직 가보지 않은 곳들이다. 파리에 있으면서 파리 바깥을 포함해 여기저기 많이 쏘다니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내 근거지는 기숙사와 코앞의 학교다. 다시 학업 모드로 되돌아간 이후, 하루 종일 도서관에 있는 게 답답하다 싶으면 요즘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가곤 한다. 이마저도 최근 생미셸 거리 일대가 관광객으로 너무 붐비는 데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할 지경이어서, 책방이 문을 닫기 직전 사람이 그나마 적은 한 시간 정도를 이용해 둘러보곤 한다.
한국에 있을 때도 그냥 딱히 찾는 책이 없어도 서점 가는 걸 좋아했는데, 여기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가는 것도 그냥 기분전환을 하기 위함이다. 지베흐 조제프보다 이곳이 더 낫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서가의 구성이 꽤 자주 바뀐다. 지난 번에 왔을 때 봤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보이지 않아서 한참 헤맸는데, 저번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진열되어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에 있어서 관심을 끄는 책이 많고, 파리나 프랑스에 관련해서 독특한 주제의 영어책이 많은 점도 흥미롭다. 가서 사고 싶은 책도 많고 책방을 통째로 들어서 서울에 옮겨놓고 싶은 심정인데, 일단은 구매충동을 참고 구경만 하고 있다.
# 이곳 파리에는—아마 주변 유럽국가의 분위기도 엄청 다르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독일은 또 모르겠다—요 근래 사회를 관통하는 몇 가지 핵심적인 키워드가 있다. 그리고 이런 핫한 주제들은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가장 눈에 띄게 진열된 책들을 봐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대충 한 세 가지 정도를 꼽자면 일단 가장 먼저 기후변화 문제가 있다. 여기서는 탄소배출 문제를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하게 다루기도 하고, 산업계에서도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실효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예를 들어 파리에 지내면서 플라스틱 용기를 쓸 일은 서울에 비하면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딜 가나 탄소탄소탄소 하는데, 덕분에 물가가 올라가는 것도 있는 것 같다. 값싼 플라스틱 용기 대신 내구성 있는 종이 용기가 쓰이기 때문. 심지어는 디지털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탄소발자국에 대해서까지 각종 세미나가 열린다. 우리가 종이 낭비를 줄인다고 생각하기 쉬운 디지털 환경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사실 탄소배출이 불가피한 인프라가 많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도 기후변화를 소재로 한 소설—이런 소설은 정말 어떤 느낌일까 싶다—부터 시작해 관련 사회과학 서적들도 많이 보였다.
두 번째는 컴플라이언스 문제가 있다. 이 주제는 사실 대륙유럽보다는 기존에 영미권 국가에서 훨씬 더 주도적으로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부패인식 조사를 보면 프랑스는 주요국들 가운데 비교적 낮은 순위에 랭크되고 있다. 정부나 기업 등 기관의 청렴성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우리나라나 일본보다는 약간 높다.) 보통은 독일이나 스웨덴을 비롯한 중북부 유럽의 부패인식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어쨌든 영미권에서 먼저 제정된 컴플라이언스 법률을 바탕으로 프랑스에서는 2016년 이른바 사팽 2법이 입법되는 등 의미 있는 반부패 이니셔티브를 마련했고, 올바른 또는 지속가능한 경영에 대한 관심도도 사회 전반적으로 높다. 다만 이와 관련된 책은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고, 학교 안에서 흔히 접하는 주제라 하겠다.
세 번째는 역시 페미니즘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사실 이곳에서는 워낙 광범위한 분야에서 다뤄지고 있기 때문에 최근에 와서 대두되고 있는 트렌드라기보다는 그냥 이제는 완전히 정착한 이슈 또는 주제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연금정책에 관련된 것이든 노동정책에 관련된 것이든 수업에서도 여성에 관련된 꼭지를 반드시 다루는 편이고, 여학생들의 경우 더 주도적으로 여성에 초점을 맞춰 관심 분야에 접근하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신문에 사회면, 정치면, 경제면이 있듯이 그냥 여성면이 따로 있는 듯한 느낌이다.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도 여성작가의 글들이 전진 배치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이곳도 이런 경향에 대한 백래시가 상존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 의외로 프랑스에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해 보이는데도 딱히 수면 위에서 다뤄지지 않는 주제라면 나는 주저 않고 이민자 문제를 꼽을 것 같다. 오히려 ’난민’에 대한 논의는 자주 이뤄지는 편이다. 하지만 2~3대에서 이제 4~5대를 바라보는 이곳 이민자와 그 후대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에 대한 논의는 공론의 장에서 정말이지 잘 보지 못했다. 이방인인 내가 이곳 거리의 풍경을 봤을 때, 이곳은 백인과 백인이 아닌 자들의 구분이 이민자의 나라 미국보다도 훨씬 철저하고 적나라하다. 나는 프랑스에서 이른바 3D 직종을 유색인종들이 도맡아 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파리의 그 많은 카페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웃고 떠드는 흑인이나 북아프리카인, 유태인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기묘한 섬뜩함을 느끼곤 한다.
공원 잔디밭에 선글라스를 쓰고 고양이처럼 미동도 없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역시 유색인종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다. 나처럼 개의치 않는 동양인들은 더러 있다. 어디가 선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은 분명하게, 아주 분명하게 이곳에 존재한다. 흔히 프랑스답다고 하는 모든 것들은 ‘진짜’ 프랑스사람들에 의해서만 향유되고, 그래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는 것 같다. 미국도 인종차별 문제가 뿌리 깊다지만 이곳은 인종에 따른 계층이 훨씬 더 세분화・고착화되어 있고, 유색인들 자체도 이 문제에 관해 그다지 공론화에 나서지 않는 꽤나 숨막히는 분위기다. 프랑스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가진 이름(franc) 그대로 분방함의 극단을 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하는 경향이 강력하다. 공론화가 되지 않는다는 게 그들이 가진 불만 자체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어서, 종종 프랑스에서 정치소요나 극단적 테러가 벌어지는 게 이러한 배경에서 나오는 것 같다. 어딜 가나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는 이곳 문화—내가 파리의 어디를 가든 서 있는 그 장소에서 세 단어 중 하나 정도는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를 떠올려보면 참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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