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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의 일기: 드랭과 위트릴로(A. Derain et M. Utrillo)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 17:29
# 몇 가지 희한한 일들이 연달아 있었다. 희한한 일이라기보다는 이곳에서 거의 홀로 지내는 편인데 유난히 사람들과 대화할 일이 많았던 오후였다고 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기숙사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외국인 학생이 머뭇머뭇하며 영어로 말할 줄 아냐며, 내게 혹시 세탁실이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다. 수척한 얼굴이었는데 딱 내가 1월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한동안 짓고 있던 표정이었다. 학교에서 이곳 생활에 관한 아주 기초적인 정보는 제공하지 않고 사교 행사가 있을 때만 분주히 안내자료를 보내오다보니, 이 학생은 세탁실이 기숙사가 아닌 학교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세탁을 하려면 옷바구니를 낑낑 들고 교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런 걸 학교 측에서 알려주지 않으면 보통 학생이 누가 상상이나 하겠나. 정말 기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이곳이다.
# 오후에는 홍콩에서 온 M이라는 친구와 잠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홍콩에서 온 사람은 처음이어서 물어보았더니 공부 자체는 영국에서 하고 있는 중이고, 베트남 식민지사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같은 3층에 살고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여기에는 같은 층에 몇 명이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곳에 도착한 지 3개월도 넘어가는데 전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거의 방 안에 콕 박혀 지내서 모를 수밖에 없을 거라며, 어쩌다 옆방 쥐이예(Juillet)와 얘기를 나누는 정도라고 옆에 서 있던 J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얘기를 하다보니 M은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무척 많이 알고 있었고, 6월말에는 컨퍼런스 때문에 한국에 갈 예정이라고도 했다. 왜 이렇게 한국을 잘 아느냐고 물으면 한국 드라마를 워낙 많이 봐서 그렇다고. 한국인들이나 알아들을 법한 대학 입시 용어들까지 한국 사람처럼 말한다. 한편 M이 워낙 청산유수로 한국에 대해 얘기하고 나보다도 더 J에게 한국에 대한 설명을 하다보니, 낭트에서 잠시 체류한 적이 있다고 한 J는 뭔가 설명을 덧붙일 의무를 느꼈는지 낭트 영화제를 하면 늘 상영작 수가 가장 많았던 게 한국 그리고 일본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얘기가 영화로 빠지니 홍콩 영화 얘기가 나왔는데, M은 홍콩이 더 이상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영화는 앞으로 나올 수 없을 거라고도 했다.
# 저녁에 잠시 기숙사 밖을 나왔는데 깜박하고 학생증을 두고 왔다. 학생증이 있어야 기숙사 출입이 가능하다. 이런 적이 벌써 여서일곱 번도 더 되는데, 이런 경우 기숙사를 출입하는 학생이 나타날 때까지 넋놓고 기다려야 한다. 다행히도 내 바로 뒤에 나오는 학생이 있었는데, 잠깐 태깅을 해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본인도 학생증이 없단다. 그도 기숙사 안 친구에게 잠깐 문을 열어줄 수 있겠냐고 전화를 걸어서야 출입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 늦은 오후에는 잠시 오랑주리 미술관을 다녀왔다. 얼마전 16구의 모네 미술관을 다녀올까 하다가 만 적이 있다. 아무리 길어도 한 시간 반 정도밖에 시간을 할애하기 어렵긴 했지만, 파리 안에 구경가고 싶은 박물관이 아직도 너무 많은지라 작은 시간이라도 쪼개서 다녀오기로 했다. 오랑주리 미술관 자체는 오르세 미술관이나 퐁피두 미술관에 비해 훨씬 작은 편이다. 그런데 오랑주리 미술관이 위치한 튈르리 공원 일대에서 오늘따라 유난히 한국어를 많이 들었다. 평소 한국어를 전혀 들을 일이 없는 환경에 있다보니 어쩌다 한국어가 들리면 더 집중해서 듣게 된다(;;)
여하간 오랑주리 미술관은 프랑스의 여느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공간이었다. 도대체 이 많은 작품들은 언제 다 그렸는지, 꽤 많은 작품들은 오르세 미술관이나 모네 미술관에서 공수해 온 것들이었다. 애당초 이들 미술관도 수장고 안에 들어가 있는 작품량이 어마어마할 테니, 오랑주리 미술관에 미술품을 대여해주는 것쯤은 대수로운 일도 아닐 것이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단연 모네 작품을 보러 가는 곳이다보니 모네의 <수련>과 <버드나무> 연작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데, 오늘 재발견한 작가는 지하 2층 전시실에 있던 앙드레 드랭과 모리스 위스틸로라는 작가들이었다. 오랑주리 미술관이 다루는 미술품의 시대적 특성상 인상주의 작품들이나 야수파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두 작가의 작품이 다른 작품들보다 시선을 확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밖에 피카소, 모딜리아니, 마티스, 세잔, 르누아르 등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화풍의 작품들이 가득해서, 종종 프랑스의 다른 박물관에 들어가서도 느끼듯이 소장량과 퀄리티에 황당함을 느꼈을 정도로 좋았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음악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많이 만들어졌고,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미술사조들은 프랑스에서 많이 탄생했는데, 작품들을 따라가다보면 프랑스인들—물론 피카소처럼 파리에서 활동한 외국 출신의 작가들도 많다—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딘가 다른 건가 싶기도 하다. 독일인들은 추상적인 관념을 배열하는 일에, 프랑스인들은 변화하는 시간을 포착하는 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모네의 작품만 해도 ‘경계를 허물어뜨린 풍경화’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듯, 인상주의라는 커다란 카테고리로 묶이기는 해도 작가 고유의 독창성이 잘 드러난다. 르누아르의 작품은 르누아르의 작품대로, 세잔의 작품은 세잔의 작품대로 매력적이다. 물론 현대에 들어와 프랑스 미술의 독점적 지위는 미국이나 영국, 독일에게 지분을 뺏긴지 오래지만, 하여간 일단 어떤 식으로든 한 번 획을 그은 작품들은 시간이 흐를 수록 가치가 더 높아지는 법인가보다.
# 오랑주리 미술관을 들렀다가 보수 공사가 막바지 단계에 들어간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파리 이곳저곳은 대대적인 보수 공사 중이어서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둘러보기 어려운 곳들이 꽤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랑 팔레, 노트르담 대성당이 그렇고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도 그 중 하나였다. 그 오벨리스크가 마침 다시 공개된 건데, 첨탑 꼭대기에 금을 새로 씌워놔서 오후의 짙은 햇살이 눈부시게 반사됐다. 이집트 룩소르에서 공수해온—이라 쓰고 ‘약탈해온’이라 읽는—이 오벨리스크는 샹젤리제의 개선문과 튈르리 공원의 카루젤 개선문 사이를 일직선으로 잇는 건축물이다. 파리의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기하학적 형상이 시내의 풍경에 새로운 느낌을 불어 넣는다. 한편 콩코드 광장 일대를 에워싸고 규칙적으로 심어진 선인장 모양의 올리브색 가로등은 퍽 세련된 느낌이 든다.'Vᵉ arrondissement de Paris > Mai'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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