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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코번트 가든(Covent Garden)여행/2022 영국 런던 2023. 3. 4. 19:09
이제 나는 트라팔가 광장으로 접어든다. 런던의 날씨가 변덕스럽다 그랬던가. 부슬부슬 여우비가 내리는 듯하더니 빗줄기가 장마처럼 굵어진다. 내셔널 갤러리의 석조 기둥들과 돌계단이 먹구름과 다르지 않은 무채색으로 조용히 빗줄기를 머금는다. 저 거대하고 단단한 돌덩이에 물이 스며들 수 있다는 사실에 잠시 놀라움을 느낀다. 오로지 청동 사자상만이 빗물을 견뎌내며 매끄럽게 윤기를 발한다.
이후 나는 내셔널 갤러리의 동쪽 골목에 자리한 Fernando’s라는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우리나라로 치면 기사식당이 느낌이 나는 가성비 컨셉의 식당이다. 나는 이곳에서 파스타와 커피로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다행히 ㅂ가 그쳐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내가 향한 곳은 코번트 가든(Covent Garden)이다. 이곳의 원형을 5세기 로마시대에서 찾는다고도 하지만, 이름 속 ‘코번트(Covent)’라는 표현은 웨스트민스터 수도원(Convent)라는 13세기 표현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 지역은 런던 브릿지 아래 버로우 마켓(Burough Market)과 마찬가지로 런던에서 수백년에 걸쳐 청과물과 식자재가 거래되는 시장의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주빌리 마켓(Jubilee Market)을 비롯한 이 일대는 제법 근대식 건물로 쾌적하다. 중세풍의 오래된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의 윤곽을 갖추게 된 건 교통 체증과 낙후된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1970년대 재개발이 이루어진 뒤의 일이라고 한다. 연원이 천 년을 넘는다고 알려진 버로우 마켓의 경우, '변화를 멈추지 않는 시장(A market that never stops evolving)'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있는데, 원래 모습이 변화를 겪더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입맛에 부응하려는 시민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코번트 가든은 활기가 넘치고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내가 시장을 찾은 날은 마침 주말이어서 탁 트인 공간마다 즉흥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코번트 가든은 런던 웨스트엔드 지역의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는데, 코번트 가든 구역의 남쪽, 그 중에서도 세인트폴 성당 앞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에 충분할 만큼 제법 넓은 공간이 있다.
여기서 한 나이든 남성이 성당의 주랑에 굵직한 줄을 걸어 놓고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며 인파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 마른 체격이라고도 할 수 없고 키가 작다고도 할 수 없는 이 남성은 스트링이 없는 테니스 라켓 안으로 머리를 집어 넣는다. 이목을 끌기 위해 동물적인 소리를 내지르는 이 초로의 남성이 걸친 옷이라곤 속옷 하나. 딴 곳으로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릴라 싶으면 외줄 위의 남성은 그 관객을 가리켜가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흔들리는 외줄 위 반라의 실루엣을 옥죄는 라켓은 목에서 겨드랑이 배, 허리춤으로 천천히 내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발목을 빠져나온다. 관객의 환호.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이 남자는 천생 광대라는 생각이 든다.
건물 안으로도 간이 무대같은 것이 있어 여러 사람들이 공연을 펼치지만 모두 다 반응이 좋은 것은 아니다. 관객의 호응이 달아오르지 않자 하던 공연을 멈추고 소도구 꾸러미를 정리해 홀연히 퇴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이곳에서 자신의 공연을 선보이고 싶은 또 다른 사람이 입장해서 또 다른 공연을 시작하는 식이다. 공연하는 이들은 이곳에서 냉정하게 자신의 역량을 점검해볼 수 있는 기회를 찾는 듯하다.
그 길로 나는 킹스웨이(Kingsway)를 가로질러 런던경제학교(LSE)를 지나갔다. 시애틀을 여행할 때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를 들른 것처럼 어떤 지역을 갈 때 그곳의 유명한 학교를 가는 건 여전히 남다른 느낌을 준다. 고풍스런 건물들 그 자체가 볼거리가 되는 워싱턴 대학교와 달리 런던경제학교는 도심 속에 산재한 현대적인 건물들로 이뤄졌기 때문에 딱히 볼거리랄 만한 건 없다. 하지만 18~19세기 일찍이 고전경제학이 태동하고 발달한 런던의 정취를 느끼는 것만으로 여행이 주는 시공간적인 현장감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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