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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 런던 탑(Tower of London)여행/2022 영국 런던 2023. 3. 20. 02:28
나는 3박 2일의 일정으로 런던에 머물렀다. 체류한 기간이 3박 4일도 아닌 3박 2일이 된 것은 유로스타가 아닌 야간버스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런던 방문이 그러했듯이 나의 런던 여행은 언제나 시간을 다툴 수밖에 없는 인연인가 싶다. 그렇게 해서 둘째 날의 아침 일정은 숙소가 자리한 올드게이트(Aldgate)에서 멀지 않은 런던 탑에서 시작했다.
런던 탑에 가기 위해 내가 하차한 지하철역은 타워힐(Tower Hill) 역이다. 블러디 타워(Bloody Tower), 솔트 타워(Salt Tower)에서 타워 브릿지에 이르기까지 탑이란 탑이 모여 있는 공간이니 만큼 이 지역에는 '타워(Tower)'라는 명칭이 어디든 따라붙는다. 지하철역명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여객선 터미널의 이름도 타워 밀레니엄 피어(Tower Millenium Pier)다. '타워(Tower)'라는 보통명사가 런던에서는 고유명사처럼 쓰여서 시내의 '타워'라고 하면 런던 탑 일대를 가리키는데, 이 지역을 방문하는 외부인으로서는 영국인 특유의 심플함이 느껴지면서도 '탑=런던 탑'이라는 사실을 알아서들 이해하라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서 다소간이나마 오만함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런던 탑은 1070년대 정복왕 윌리엄에 의해 런던 심장부에 세워진 요새다. 13세기 헨리 3세가 성채의 킵(keep; 성채 중심부의 요새)을 새하얗체 회칠한 것을 계기로 화이트 타워라는 이름을 얻게 된 성 중심부를, 두 겹의 성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블러디 타워, 솔트 타워, 뷰챔프 타워(Beauchamp Tower) 등 크고 작은 탑들은 마치 노드(node)처럼 이들 성벽을 한땀한땀 잇고 있는데, 바로 이 성벽 위를 따라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어 이 위를 걷다 보면 템즈강에서부터 시티 구역에 이르기까지 런던 시내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
내가 런던 탑을 찾은 날 역시 주말이었던 까닭에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라면 중세의 철제 갑옷에나 쓰일 법한 쇠사슬로 엮어 놓은 동물 형상들이 성채 안팎으로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 왕실의 상징인 사자가 아니더라도 도대체 이 요새와 무슨 상관이나 있을까 싶은 북극곰, 코끼리, 표범 따위의 동물들도 보인다. 처음에는 일종의 현대 설치미술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성채이자 왕실의 거주지이자 감옥이었던 런던 탑은 동시에 동물원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미 중세부터 동물원(managerie)으로 공간을 활용했던 관습은 19세기까지 이어졌고 각국 사절들이 보내온 진귀한 동물들이 사육되었다고 하는데, 열대동물들이 살기 힘든 런던의 기후를 생각해본다면 그 풍경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런던 탑 안의 예배당이나 부속탑, 왕실이 거처했던 공간이 각별하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도 프랑스에 있는 동안 비슷한 공간들을 이미 많이 구경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그것들이 대체로 더 화려하고 웅장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중세에 세워진 런던 탑과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건축물들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런던 탑에 깃든 전설과 미신, 의식(ceremony)은 런던 탑에 신묘한 분위기를 더한다. 특히나 런던 탑은 유배되다(sent to the tower)라는 관용구가 만들어졌을 만큼 왕족 또는 유명인인이 투옥되었던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수용소로써 런던 탑의 위세는 장미 전쟁과 튜더 왕조를 거치면서 널리 알려졌는데,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였던 앤 불린도 이곳에서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밖에 같은 16세기에 이곳에서 처형당한 왕비로 캐서린 하워드(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왕비), 제인 그레이(헨리 7세의 차녀로 왕비 신분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가 있는데, 목이 잘려나간 이들의 처형당한 몸통은 아무런 묘비도 없이 예배당 아래에 묻혔다고.
그런 연유에서인지 옛날 사람들이 '런던탑에서 까마귀가 떠나면 왕가가 망한다'고 믿었다는 이야기는 이 중세 공간에 기괴한 분위기를 더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흉흉한 이야기는 당시 이곳의 경비원(Yeoman)들이 까마귀를 날지 못하게 하려고 한쪽 날개를 잘라 관리했다는 설화다. 그만큼 런던 탑은 왕가의 공간으로서 상징적 의미가 큰 곳이다. 나는 다른 의미에서 온갖 상징으로 가득한 곳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바로 왕실의 보석 컬렉션이 진행되고 있는 워털루 블록(Waterloo Block)이다. 사진촬영이 금지되고 있는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왕실의 초호화 보석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한켠의 전시화면에 연속 재생되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은 당시의 낡은 화질에도 불구하고 이 오래된 공간에 권위를 불어넣는 듯했다.
이곳에서 놓칠 수 없는 또 한 가지의 구경거리는 오래된 돌탑 사이를 누비는 경비원과 근위대들이다. 요먼(Yeoman), 옛 젠트리와 농민 사이의 중산층에서 충원되던 이 경비원은 왕의 식탁에서 원없이 소고기를 뜯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비피터(Beefeater)라고 지칭되기도 했다. 그런 요먼은 오늘날 관광객들을 인솔하며 런던탑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때 런던탑에서 흉조로 여겨졌던 까마귀를 애지중지 관리하는 동물 보호자로서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위압적인 검정 버스비를 눌러쓴 근위병들은 시간이 도래할 때마다 과장된 동작으로 교대식을 행해서 보는 재미를 더한다.
그렇게 아침나절을 보내가 배가 촐촐해졌다. 나는 성을 빠져나와 조그마한 상점가에서 피쉬 앤 칩스를 사들고 바깥에 앉아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런던 탑을 둘러보는 내내 템즈 강 너머 스카이라인에 뾰족한 끝을 빼꼼히 내놓고 있던 더 샤드(The Shard)의 전망대에서 펼쳐질 파노라마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정보를 찾아 보았지만 입장료가 사악하다. 내게 할애된 짧은 일정을 어떻게 써야 좋을지 생각을 굴려보다가 이내 시티 구역을 거닐어 보기로 한다. 나는 무르팍에 떨어진 튀김가루를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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